| 이웃사랑 실천 “마음의 키 한 뼘 더 컸어요" | news | 2008-02-20 |
방학은 여러 모로 유용하다. 학업성취가 미진했던 부분을 채울 수도 있고 학교를 파하고도 계속되는 학원 순례에 지친 몸과 마음을 운동 등을 통해 추스를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녀도 으레 아침이면 등교 전쟁을 치르고 저녁에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탓에 부모-자식간 대화가 부족하기 쉬운데 방학은 대화의 장을 만들어주는 카운슬러 역할도 한다.
하지만 대화의 시간이 열려도 정작 사춘기 자녀와의 대화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 이럴 때 자녀 손을 잡고 자원봉사를 나서는 것은 어떨까. 함께 땀흘리는 사이 부모-자식간 정이 새록새록 묻어날 것이다. 마침 온 국민의 관심이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 사고로 서해안에 쏠린 사이 우리 주변엔 자원봉사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 많다.
지난달 16일 오후 권영순(48)·전재승(구봉고 2년) 모자와 이종영(42)·박이슬(구봉고 2년) 모녀는 오랜만에 손에 손잡고 서구 관저동 김종철 할아버지(81)와 이종옥 할머니(79)를 찾아 나섰다.
가는 길에 동네 슈퍼에 들러 작은 선물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씨가 무얼 살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박양은 이가 없어 딱딱한 것을 잘 씹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위해 부드러운 카스텔라 빵을 집어들었다.
가게를 나와 몇 차례 주택가 골목길을 접어 돌아 도착한 한 이층집 앞에 차가 멈추자 전군과 박양이 우당탕 요란하게 좁은 이층 계단을 잘도 밟아 올라간다. 그리고 잠시 뒤 “할머니~!"하는 애교섞인 목소리에 “아이구, 어여와. 많이 춥지."하는 정겹고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가 담을 넘어 전해졌다. 할머니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는 박양의 모습은 영락없는 친할머니와 손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전군과 박양은 2004년 조직돼 지난해 전국중·고생자원봉사대회에서 동상을 받은 구봉고(교장 서시완) 봉사동아리 ‘푸른누리’ 활동을 통해 독거노인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권씨와 이씨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건 부모와 자녀가 함께 자원봉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푸른 누리만의 독특함 때문이다. 처음엔 자녀의 자원봉사 방문에 운전기사 노릇만 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던 어머니들은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현장에서 일손을 거들며 어느덧 자원봉사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했다.
론 피곤하다며 집에서 쉬고 싶어하는 남편을 일으켜 세워 전기시설이나 고장난 가전제품을 수리하게 할 만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아리에서 사진을 담당하는 이씨는 “(박)이슬이가 사춘기가 일찍 오면서 대화가 많이 부족한 것이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봉사 동아리에 부모가 동참할 수 있다기에 같이 움직이면 서로 얘기할 기회가 많아질 것 같아서 참여하게 됐어요. 처음엔 싸우기도 했지만 이젠 친구처럼 친해요. 그리고 딸아이가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엄마로서 뿌듯합니다"라고 말했다.
난생처음 자원봉사를 시작할 땐 쉬는 주말에 일찍 일어나 봉사학습에 나서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박양도 이유없이 무섭고 멀게만 느껴졌던 장애우들과 접하면서 “이 친구들도 그저 몸과 마음이 조금 불편할 뿐이지 우리와 다르지 않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생이던 누나 손을 잡고 장애복지시설 등을 다녀온 탓에 박양보다는 장애우들과의 만남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전군은 어머니 권씨의 솔선수범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감동했다고 한다.
권씨가 지체장애우를 집으로 초대해 생활하는 홈스테이에 참여하고 친딸처럼 함께 동네 목욕탕에도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비록 말동무가 돼 주거나 몸이 불편한 장애우의 산책을 돕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이긴 해도 (스스로의) 봉사활동에 애착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이날 이들은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모처럼 웃음꽃을 피우며 회포를 풀었다. 특히 전군과 박양은 틈틈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어깨와 무릎을 주무르며 고3 수험생이 되는 올해는 예전처럼 자주 찾아뵙지 못할 것 같아 죄송하다고 아쉬워했다.
권씨와 이씨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들르지 못해 미안하고 한편으론 보일러가 변덕스런 봄처녀처럼 말썽을 일으키는데도 자신들에게 즉각 연락하지 않아 서운하다며 볼멘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작은 방에는 혈육의 정을 넘어서는 따뜻한 이웃의 정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권씨는 “(전)재승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 계시다 보니 친할아버지·할머니를 모시듯 즐거워합니다. 저도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니 즐겁고요. 그리고 언제부턴가 자원봉사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한 봉사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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