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츄리닝에 쓰레빠가 한복을 망쳤어…" | news | 2008-04-23 |
기능경기대회 최고령 참가자 한은순 할머니, 꼬장꼬장함으로 60년 한복 바느질 인생 걸어
전 세계 스포츠인들이 4년에 한번씩 올림픽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인다면, 경기도내 전문 기술·기능인들은 매년 경기도기능경기대회에서 자신의 실력을 맘껏 뽐낸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2008 경기도기능경기대회 개최 소식에 뭔가 꺼리가 없을까나 하고서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옳다커니, 이번 대회 최고령 참가자가 눈에 들어온다. 69세의 한은순 할머니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다.
그의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서 신호가 가기를 기다리니 방심하고 있던 찰라 귀가 번쩍할 정도로 쩌렁한 목소리가 저편에서 맞이한다.
“아~ 제가 한은순이 맞습니다” 우렁차면서도 힘이 들어간, 그야말로 당찬 목소리에 ‘고령’이라는 수식어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인터뷰를 요청하니 노인네한테 뭐 특별난게 있다고 인터뷰씩이나 청하냐면서도 흔쾌히 수락하고서 껄껄 웃음을 쏟아낸다.
일흔 둘, 야무진 손재주로 ‘처녀 출전’
16일,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 수원대학교 정문에 도착해 한은순 씨가 운영한다는 한복연구소가 어디에 있나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살피는데, 저만치 네모 반듯한 컨테이너 박스에 전통 창살문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어 눈에 띄는 ‘한은순 한복연구소’ 간판.
‘아, 여기구나’ 싶은데 그새 새싹 같은 연두 저고리에 짙은 보랏빛 치마를 받쳐 입은 그가 마중을 나와 있다. 굳이 확인을 하지 않아도 차림새에서 한은순 씨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기능경기대회 최고령 참가자란 이야기를 건넸더니 “예순아홉? 아니에요~ 나는 37년생 소띠, 그러니까 실제 나이는 일흔두살인데 그 시절에는 돌림병이 많아서 애가 태어나도 곧장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어요”
머리에 백설이 내려앉긴 했지만, 꼿꼿한 허리에 걸출한 입담과 호탕한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예순아홉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차에 그보다도 무려 3살이나 많다는 대답이다.
일흔둘의 나이에 뒤늦게 처녀 출전하게 된 이유를 물었더니 너무도 솔직한 답변이 돌아왔다.
“작년에 한복 명장 신청을 넣었더니 9명 중에 3등을 했어요. 1등부터 3등까지는 다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면서도 명장은 1등, 단 한명에게만 주어요. 그게 너무 안타깝더라고…. 그런데 주위에서 누가 그래. 국가기능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추가 점수가 있다고…”
그렇게 지인의 권유로 대회 참가신청서를 넣고 경기장에 도착해보니 만감이 교차하더란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청춘이야~ 노인네가 주책을 떨었구나, 여기 오는게 아니었는데 괜히 엉뚱한 짓 했구나, 이런 생각만 들었지. 그런데 뭐 별 수 있나요?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작업하고 왔어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표현에서도 충분히 드러나듯 그는 거침없고 당찼다. “그런데 떨어져버렸어”라고 이어지는 대답. 그 와중에도 껄껄 웃음은 잃지 않는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고 대답인지라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시간 부족으로 탈락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한복을 짓고 학생들을 가르칠 줄만 알았던 그에게 대회는 낯설기만 했단다. 사전 정보도 부족했을 뿐더러 한땀 한땀 꼼꼼하고 반듯하게 바느질 하려던 그의 고집은 결국 제한 시간 초과로 탈락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5분만 더 줬으면 탈락까지 하지는 않았을텐데…”라며 아쉬움의 여운을 남기면서도 규율은 정확하게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억울하지는 않다고 힘주어 말하는 모습에서 그의 꼬장꼬장함이 엿보였다.
40년 된 한복 지금도 입어… ‘한복 할머니’ 애칭
화제를 돌려 그의 한복 이야기를 새로운 화두로 꺼내들었다. 그러자 걱정이 많은 듯 긴 한숨부터 터져나온다.
“한복 짓는 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다는 것, 그리고 츄리닝에 쓰레빠만 신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문화, 이런 것들이 우리 고유의 한복문화를 쇠퇴시키고 있어요”
일상생활에서도 한복을 자주 입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답게 자신부터 앞장서서 한복의 생활화를 수십년째 이어오고 있다.
인터뷰 당일 입은 옷도 직접 만들어 닳고 해지면 다시 고쳐 입기를 되풀이하며 40년째 입고 있는 옷이란다. 활동하기 편하도록 치마 기장은 발목 위에서 떨어지게 한 것이 특징이다.
외출할 때는 물론 집안에서도 한복을 입는다는 그는 덕분에 ‘한복 입는 할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복에는 우리 조상의 슬기가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계절에 맞는 좋은 옷들이 얼마나 많은데, 요즘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한복이면 다 같은 한복인 줄 알아요. 깨끼한복 한 벌로 계절 구분 없이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죠”
병든 남편 수발로 삯바느질 시작… 어느덧 60년
이쯤에서 그의 한복 바느질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보기로 했다.
내 저고리부터 만들어 입기 시작했던 것이 12살 겨울방학.
“그때는 6·25 전이라 남방, 블라우스 하나 없을 때지. 내 옷을 직접 지어입지 않으면 입을 옷이 없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고 계속 바느질을 해왔다. 18살이 되면서부터는 아예 재봉틀을 사서 한복 짓는 일로 여덟 식구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의 60여년에 달하는 한복 바느질 인생 중 바늘을 손에서 놓아본 것은 10년도 채 안 된다.
처음 바늘을 손에서 놓은 것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결혼을 하면서 바늘을 놓았다. 아니, 바늘을 놓기 위해 결혼을 택했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바느질이지만 남편이 병을 앓게 되면서 남편 월급의 2/3 이상이 약값에 들어가다보니 배가 고팠다.
그래서 다시 바늘을 들고 재봉틀을 돌리기로 마음 먹었다. 남편이 구해온 함석 조각으로 한복집 문패를 만들어 달았더니 3일 만에 첫 주문이 들어왔다. 그렇게 지어 보낸 옷에 손님의 칭찬이 이어졌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일은 더 많아졌다.
하루에 저고리 11개, 두루마기 3개씩을 꿰매던 날도 있었다. 주위에서는 그를 향해 ‘손이 귀신’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날로 늘어가는 일감을 소화해내며 그는 체계적인 교육과 전문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한복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위기감에서다. 1980년대 남문에 크로바 백화점이 생기면서 목 좋은 자리에 가게를 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자 서울 상인이 그 자리를 꿰찼고 그때 정신이 번뜩 들더란다.
“이러다가 수원의 한복 상권이 외지 상인들에게 잠식당하게 될 것 같았어요. 수원에 좋은 일꾼들은 다 어디에 써야 하나 걱정스러웠죠”
그러던 차 1981년 가을, 경기도여성회관(현재 경기도여성비전센터)의 관장이 한복 강좌를 개설해보자는 제안을 해 왔다.
흔쾌히 수락한 그는 이듬해인 1982년 2월부터 1994년 6월까지 경기도여성회관 한복 과정 강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해냈다. 그 사이 개인 학원을 통해서도 제자들을 양성하는 등 가르침에 있어서는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의 제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우리 고유 의상을 손수 만들며 전통을 계승해나가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꼼꼼한 바느질 ‘탓’에 탈락 고배… 될 때까지 도전
지금의 그는 일반 한복도 그러하지만 궁중복식에도 조예가 깊다.
못다 이룬 학업의 꿈을 잇기 위해 지난 1999년 성균관대 생활과학대학 2기 궁중복식과정을 수료했고 지난해에는 단국대 전통복식과정을 수료하면서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갔다.
평생을 지어오며 쌓은 한복 바느질 솜씨에 학교에서 배운 이론까지 더해지니 지식과 실력을 두루 겸비한 그야말로 전문 한복인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6월부터는 사단법인 한국궁중복식연구원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 쉬지 않고 틈틈이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과 온고을 전통공예 전국공모전 등 각종 대회에 작품을 출품해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도 있다.
언제나 우리 고유의 맥과 혼을 남다른 끈기와 노력으로 이어가고 있는 그. 전통 한복의 아름다움을 동정 하나, 옷깃 하나하나마다 오롯이 담아내는 그에게서는 20대 청춘 못지않은 열정이 뿜어져 나온다.
한복과 함께 평생을 걸어온 ‘한복 입는 할머니’ 한은순 씨에게는 야심찬 꿈이 하나 있다.
앞으로도 계속 고운 한복을 짓고 더 나아가 무형문화재가 되어 아름다운 우리 옷을 계승할 후학들을 양성하는 것.
이번에 아쉽게 탈락한 경기도기능경기대회에 대해서는 “당연히 내년에도 도전해야지요, 칼을 꺼냈으면 과일이라도 깎아봐야 할 거 아녜요”라며 사뭇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다.
일흔둘의 지긋한 나이에 돋보기가 없어도 작은 바늘귀에 실 하나 꿰는 것쯤은 거뜬하다는 그, 한복 바느질은 누가 보든 안보든 자고로 반듯하니 정성스럽게 혼을 담아 꿰매야 한다는 그, 시련을 이야기 할 때도 껄껄 웃음을 잃지 않는 그, 평상복보다도 한복이 더 편하고 좋다는 그, 이런 그가 진정 한복의 달인이요, 프로요, 장인이 아닐까 싶다.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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