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리의 말뚝 하나도 장애인에겐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 news | 2008-04-29 |
16년간 장애인 문제 앞장… 해결될 때까지 끝장보는 ‘저승사자’
“장애인만을 위한 일이 아닌,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기 위한 것”
‘장애인 권익 지킴이’란 점잖은 별칭이 있지만 사실 그는 ‘저승사자’로 더 알려져 있다. 일년 열두 달 늘 입고 다니는 검정색 옷 때문이 아니다. 장애인의 편의와 안전을 무시하는 시설과 편견에 대해 억세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끝장을 보기 때문이다. ‘해결사’라는 별명도 그래서 나왔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세상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16년 동안 계속하고 있는 박종태(50)씨 얘기다.
지난 3월 24일 오후 박씨를 만났다. 오전에 안산 집을 나와 시내를 한 바퀴 돌며 장애인을 위한 시설물이 제대로 설치됐는지, 고장 없이 잘 작동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위해 근처 찻집으로 가는 길에도 그의 ‘활동’은 계속됐다.
서울시의회 정문 앞을 지나던 그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유도 블록을 가로막고 주차된 자동차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점자 유도 블록은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눈과 같은 것인데 그 앞에 차를 떡 하니 세워 놓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길 가다 부딪혀 정강이가 부러지기라도 해야 정신을 차릴까요. 당장 차 빼세요.”
박씨가 이번에는 시의회 앞 지하보도에 설치된 회색 점자 유도 블록을 가리켰다. 깔끔해 보이는데 뭐가 문제냐는 물음에 그는 “대체 이걸 왜 설치한 것 같으냐”고 반문했다.
“비장애인들에겐 별 차이가 없어 보이겠죠. 하지만 저시력자나 약시 장애인의 눈에는 흐릿해서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모가 잘 안 되고 보기에도 좋다는 이유로 스테인리스제(製) 점자 유도 블록을 설치한 곳도 적지 않은데 햇빛에 반사돼 잘 보이지 않아서 저시력 장애인들에겐 별 도움이 안 돼요. 오히려 비오는 날 발을 디디면 미끄러지기 쉬워서 위험물이 된다니까요.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답답한 게 한둘이 아니에요.”
찻집에 도착한 박씨는 주문도 하지 않고 행정기관에서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고 짓는 시설물이나 권익을 침해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며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는 우선 화장실 얘기부터 시작했다.
“수백억대 청사에도 장애인 화장실은 1층에만
바로 이런 인색함과 무관심이 개선을 지연시켜”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라고 있죠. 문제는 장애인 편의시설의 설치 기준이 의무가 아니라 권장 사항이란 데 있어요. 설치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셈이죠. 시민의 혈세를 들여 새로 짓는 공공 건물의 경우에도 장애인용 화장실을 1층에만 형식적으로 설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박씨가 물었다. “남녀가 구분된 장애인 화장실을 설치하는 것을 예산 낭비라고 보는 시각,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장애인 차별을 떠나 이건 엄연한 인권 침해”라고 했다.
“대부분의 장애인 화장실은 남녀 공용입니다. 남자 화장실 입구에 따로 한 칸을 설치해 놓고 장애인 여성에게 이용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장애인들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남녀 공용이라도 고맙게 사용하라는 말인가요? 세계 화장실 대회가 열린 우리나라입니다. 어떤 장애인 화장실은 청소도구 창고로 쓰이기도 하죠. 수백억원을 들여 관공서 청사를 들이면서 장애인 화장실을 남녀 따로 짓는 데는 왜 그리 인색한지…. 예산 타령만 하는데 장애인 전용이란 푯말을 걸어 늘 비워두지 말고 비장애인들도 사용할 수 있는 시설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박씨는 인터넷 장애인 신문인 ‘에이블 뉴스(www.ablenews.co.kr)’의 객원 기자다. ‘현장 점검’ 코너에는 그가 불편한 다리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고발한 사례가 가득하다. 올 들어 그가 올린 기사만 해도 20여건에 육박한다. 불편한 화장실은 그중 단골 메뉴다.
‘장애인 화장실은 1층에만 있으면 될까’(3월 21일)라는 제목의 기사는 박씨가 최근 완공된 경기도 이천시의 행정타운을 직접 둘러본 취재기다. 시 청사 건물에는 장애인 화장실이 1층부터 9층까지 설치돼 있지만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정작 1층 한 곳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2층부터 9층까지는 공간이 비좁아 휠체어 장애인의 접근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다. 인근 시의회 건물에도 장애인 화장실이 마련됐지만 비좁은 탓에 휠체어 장애인은 시 청사 건물까지 다시 가서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 ▲ 점자유도블록 가운데에 말뚝을 박아 위험한 서울 서초동의 인도./장애인 출입구가 차단된 어느 방송사의 현관. photo 박종태
“고장난 횡단보도 음향신호기, 인도 곳곳엔 장애물…
외출 한번 하는데 목숨 걸어야 하나요”
‘검찰청 장애인 편의시설을 점검했더니’(2월 13일) 기사에서는 전체 15층 청사 건물 중 지하 1층에만 장애인 화장실을 설치한 검찰청의 무신경을 질타했다. 조사를 받거나 용무가 있어 방문한 장애인이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지하 1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 실제 검찰청에 가 보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의 장애인 화장실로 가려면 철제 문 두 곳을 지나야 했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장애인 혼자 문을 여닫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도 박씨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부분 중 하나다. 몸이 불편해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열악한 교통 시설물 탓에 생명을 내놓고 외출해야 하는 현실, 바로 그걸 바꿔보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박씨는 ‘KBS 방송국 장애인 편의시설 유감’(3월 10일)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유도 블록이 설치된 출입문을 막아 셔터를 내린 뒤 차단봉까지 설치한 KBS의 행태를 꼬집었다. 신관 건물 출입문 3곳 중 2곳에 스테인리스제 점자 유도 블록을 설치했지만 유독 설치되지 않은 곳으로만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
삼성그룹이 강남역 근처에 신사옥을 지으면서 건물 주변 횡단보도에 설치한 점자 유도 블록에 대한 문제점도 있었다. 차량 진입과 불법 주차를 막기 위해 인도에 설치하는 경계 말뚝인 볼라드(billard)를 점자 유도 블록 한가운데 박아놓은 것. 유도 블록을 따라가던 시각장애인이 갑자기 나타난 볼라드에 걸려 넘어질 우려가 커 보였다. 차량 진입을 막겠다고 별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설치한 시설물이 장애인에게는 흉기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씨는 “볼라드의 위치 조정뿐 아니라, 부드러운 폴리우레탄 소재를 덧씌우고 내부에는 용수철을 설치해 충격 흡수가 가능한 볼라드를 설치하여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거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연말 박씨는 1급 시각장애인의 출근길을 따라 나서기도 했다. 관악구 봉천동에서 구로역 인근의 일터까지 매주 6일 동안 출퇴근하는 시각장애인 윤모씨를 동행 취재한 것. 지체장애인이어서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구로역과 애경백화점을 잇는 육교에는 좌측 통행을 위한 경계 시설물이 설치돼 있는데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들이받을 수밖에 없는 장애물이었다. 백화점 앞 육교 바로 아래에 설치된 대형 석조 조각 전시물도 시각장애인에겐 갑자기 맞닥뜨리게 되는 ‘장벽’과도 같았다. 박씨는 “장애인들에겐 정말 지뢰밭과 같은 곳”이라며 “백화점 내부의 편의 시설이 아무리 잘 갖춰져 있어도 주변 시설이 이렇게 엉망이라면 장애인들은 이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용 음향 신호기와 음성 유도기가 잘 가동되고 있는지도 그가 챙기는 부분 중 하나다. 지난 2월 5일 그가 고발한 내용은 이렇다. ‘서울 을지로 3가 명보프라자 사거리 횡단보도에는 총 8대의 음향 신호기가 설치돼 있다. 그러나 그중 7대의 음향 신호기가 리모컨을 눌러도 작동하지 않았다. 음향 신호기는 철 기둥에 부착된 버튼을 눌러도 작동하지 않았다. 고장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발광다이오드(LED)도 7대는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현장 얘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비싼 돈을 들여 제품을 설치했지만 쉽게 고장나고 방치된 탓에 시각장애인들의 외면을 받았다는 것이다.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조금 비싸더라도 사전에 품질 검사를 까다롭게 하고 장애인의 사용 의견을 다각도로 수렴해서 제품을 선정해야 합니다.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엉터리 제품을 내놓는 업체,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이런 제품을 사주는 정부 모두를 제한하는 강력한 법규도 마련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국가 표준을 만들어서 제품의 질보다는 단가에 치중해 저가 제품을 구매하고 결국 잦은 고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고 했다.
박씨는 지체장애 2급의 장애인이다. 16세 때 당한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사고 뒤 천주교 성당에서 모금을 벌여 인공 관절을 이식했다고 했다. 1990년대 초반 일용직 노동자로 자동차 부품 업체를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갈 때에는 왼손 손가락 세 개가 프레스에 눌리는 산재(産災)를 당했다. 뒤틀린 손가락 때문에 박씨는 지금도 왼손은 잘 쓰지 못한다. 그가 옛 이야기를 했다.
“저는 부모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고아입니다. 천주교 보육시설에서 자라났죠. 열여섯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온몸에 깁스를 하고 똥오줌을 받아내는 생활을 1년 동안 했습니다. 중증 장애인의 고통과 심정을 뼈저리게 느꼈죠. 퇴원한 뒤에는 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 한번 살아보자 결심했죠. 몸을 추스른 뒤에는 교도소 출소자를 상대로 봉사활동을 했고 맹아 학교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박씨의 보금자리는 경기도 안산시 선부동의 12평짜리 영구 임대아파트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에 집을 나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8~10시간 동안 거리를 돌아다닌다. 지인이 기증한 검정색 올림푸스 디지털 카메라를 꼭 들고 다닌다. 일정은 따로 없다. 발길 닿는 곳이 그의 활동 무대다. 그는 전국 각급 지방자치단체 중 가 보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자면 교통비가 적지 않겠다고 했더니 지하철과 기차 요금은 장애인이라 절반만 내면 된다고 했다. 기초생활 수급권자인 박씨는 성당의 도움을 포함해 한 달에 60만원 정도를 받는다.
158㎝의 작은 키. 눈빛은 똑바로 쳐다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매섭다. 그는 한때 비타협적인 외골수 활동가로 유명했다. 1998년 5월 안산시의회 본회의장에 불을 질러 3개월 동안 복역하기도 했다. 안산시 장애인 복지회관 건립과 관련해 ‘혐오 시설’이라며 반대하던 시의회에 격분해 회의장 책상 위에 라이터용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것이다. “당시엔 시의회 본회의장이 진짜 혐오시설이라고 생각했어요.”
2002년에는 명동성당과 가톨릭 회관의 장애 시설이 개선돼야 한다며 ‘친정’과도 같은 천주교를 상대로 1인 시위를 벌였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주위의 눈총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이웃 사랑을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 종교 기관이 장애인 권익 문제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 ▲ 어느 백화점 앞에 설치된 석조 전시물. photo 박종태/ 투표소 입구 인도의 턱.
“무작정 떼쓰거나 들러리 서는 장애인 운동은 곤란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홀로 내 길을 갈 겁니다”
박씨는 동료 장애인들에게 격려 전화와 메일을 많이 받는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가려운 곳을 찾아 긁어주고, 불합리한 것을 고치기 위해 맹렬히 싸우는 ‘동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다. 그는 주변의 오해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관련 지자체나 기업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는 “검은 돈 한 푼이라도 받았다면 제가 이 자리에 이렇게 떳떳하게 설 수 있겠냐”고 했다.
박씨는 자신을 장애인 운동가로만 보지 말아달라고 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활동이라고 했다.
“신체적 장애를 ‘무기’로 삼아 떼쓰기식으로 들이대는 장애인 운동이 많다” “정당하게 권리를 요구해야지 장애를 빌미로 악용해선 안 된다”면서 일부 장애인의 비뚤어진 자세를 지적하기도 했다. 일부 장애인 단체의 도덕성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누굴 위한 장애인 단체인가 생각해 볼 때가 많아요. 업체의 들러리로 전락하지는 않았나 하는…. 진정 장애인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공무원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업체와 충돌하고, 장애인 단체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외톨이도 이런 외톨이가 없어요. 그래도 전 제 길을 그냥 갈 겁니다.”
박씨는 늘 검정색 옷을 고집한다. 몇 년 전 사진에도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수도자의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단벌이냐고 묻자 “그런 것은 아니고 같은 옷이 몇 벌 있다”며 웃었다. 세례명은 빈첸시오. 소외 당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살폈던 프랑스 성인(聖人)의 이름과 같다고 했다. 그의 이메일 아이디는 so0927@chollian.net. 빈첸시오 성인의 축일(탄생일)인 9월 27일을 기억하겠다는 뜻이라며 제보를 기다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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