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도 쓸모없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보고 싶었다” | news | 2008-07-17 |
모두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교수에게도 ‘선생님’이고, 대학?대학원 동기들에게도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대학 교정에서 박윤자(65) 씨는 그 누구보다도 학생다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월을 얹은 주름살이 살풋 얼굴에 얹혀 있는 정도였다.
60대에 대학으로 돌아온 박씨는 그야말로 ‘열혈’ 학생이었다. 2005년 8월 이화여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박씨는 다음해 3월 이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8월 대학원 졸업을 기다리며 박사과정을 위한 해외 유학 준비에 여념이 없다는 박씨의 표정은 여름 햇살만큼 환했다. “남들은 지혜롭게 직선으로 가로질러 공부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학업을 위해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힘든 점이야 말도 못하게 많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어차피 내가 선택한 길이고, 앞으로도 그 길을 갈 테니까.”박씨가 60대에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게 된 사연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박씨는 이대 심리학과 62학번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졸업을 1학기 앞두고 박씨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고 대학을 떠났다. 이 결정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당시 이대에 결혼한 여성의 재학을 금지하는 ‘금혼학칙’이 있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박씨의 눈은 아스라한 과거를 향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어 중학교도 가지 못했어요. 다행히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받아 중학교에 남들보다 1년 늦게 진학했고, 고등학교에도 가긴 했습니다만 진학반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진학반 친구들이 도시락 쌓아놓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순간 부러움이 왈칵 치밀더라고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샀습니다.
대학 진학을 위한 시험 25일을 앞두고 그야말로 ‘악을 써서’ 공부했고 과 차석으로 입학했지요. 대학 다니는 동안에도 등록금을 내기 위해 내내 일을 했습니다.”그렇게 힘들게 입학해서 어렵게 수학했던 대학, 하지만 성적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고 전공은 적성에도 잘 맞지 않았다. 게다가 병이 위중했던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결혼도 서두르게 됐다. 그렇게 박씨는 학교를 도망치듯 떠났다.
이후 박씨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았다. 가내 수공업, 번역 등 다양한 일을 했고 60세까지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 방송통신대에 진학해서 영문학 학사 과정도 마쳤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어느덧 박씨는 사랑스러운 손자까지 보게 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젊은날 포기했던 공부에 대한 미련은 더욱 깊어졌다. “제가 제발로 떠났던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어요. 이미 학사 학위가 있는데도 그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내 젊은날의 경솔한 선택을 후회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겠지요.”40년이 넘도록 젊은날의 학업 중단에 대한 자책에 시달렸다는 박씨에게 한줄기 희망이 우연처럼 다가왔다. 2004년 박씨는 가족과 친구를 통해 “2003년에 이대가 금혼학칙을 폐지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박씨는 바로 학교로 향했다. 하지만 재입학은 만만하지 않았다. 일단 재입학이 허용되려면 결혼을 한 시기와 학교를 그만둔 시기가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박씨의 경우 결혼식 후 몇년이 지난 다음 혼인신고를 한 데다가, 자퇴서 등을 내는 절차를 밟지 않고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서류상 제적 일자가 실제 학교를 떠난 시기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박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학교 관계자를 닥달하다시피 해 재학 당시 전공 교수가 사실관계를 확인해 주면 허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박씨는 바로 교수에게 달려갔다. “교수님을 40년 만에 만나뵙는데 빈손으로 갈수도 없잖아요.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인데 문 닫으려고 하는 가게에 들어가 과일을 사서 염치 불구하고 오밤중에 교수님 댁 문을 두드렸습니다.”우여곡절 끝에 박씨는 2004년 43년 만에 학부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신분은 학생이었으되 나이는 교실에서 가장 많았다. 대학 동기들과 40세 이상 나이차가 나는 건 물론이고, 교수들 중에서도 박씨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고, 박씨의 수업 도우미였던 손녀뻘인 동기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껄끄럽지 않았을까. 박씨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학교에 노인 행세하러 온 게 아닙니다.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배우는 건 당연한 거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손을 놓았던 전공 수업은 만만치가 않았다. 초기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귀도 잘 들리지 않고 눈도 침침했기 때문에 박씨는 항상 일찍 강의실에 도착해 맨 앞에 자리를 잡고 녹음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3시간 강의를 다 녹음해 48시간 동안 녹취를 풀어서 다시 공부했다. “이쪽 귀로 들으면 바로 저쪽 귀로 흘려버리는 기분이었어요. 공부하는 ‘감’과 ‘요령’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절망감도 들었지요. 처음 돌아왔을 때 학점은 그야말로 형편없었습니다.” 하지만 박씨는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씨는 굴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학기에 수강한 과목은 모두 A학점을 받았다. 그중 중국어 과목은 중국어 글자도 쓸줄 몰랐던 박씨가 매일 공부해서 일군 학점이라 더 값지다.
2005년 8월 학부를 졸업한 후에도 박씨의 도전은 계속됐다. 전공을 변경해 대학원 석사 과정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재입학 당시에는 석사까지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학부를 다니다 보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이미 우리 사회는 고령화하고 있는데, 노인들은 ‘퇴물’ 취급을 받고 있잖아요.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내가 석사 과정을 끝내서 ‘노인도 쓸모없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보고 싶었습니다.
노인 복지에 대해 일하고 싶다는 꿈도 키우게 됐습니다.” 새로운 전공에 적응하기 위해 박씨는 2005년 후반기에는 사회복지학과 학부 수업을 청강했고, 2006년 3월 이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학부 과정을 마치면서 어느정도 단련됐다고 생각했지만, 석사 과정은 험준한 산과 같았다. 전공을 변경해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에 전공자보다 더 많은 학점을 이수해야 했다. 공부도 만만치 않았다. “젊었을 때는 책 3번만 보면 A학점이었을 텐데, 이제는 10번은 봐야 합니다. 젊은 대학원 동기들보다 3~4배는 더 노력했습니다.” 신체의 한계도 문제였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돋보기를 쓰고 확대기로 책을 보면서 공부했다. 학부 때처럼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수업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석사 과정 내내 수면시간은 평균 4시간에 불과했고, 석사 논문을 준비할 때는 4~5일을 잠시 눈붙일 틈도 없이 밤을 샜다. 박씨는 “노인 세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전문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뛰어든 석사 과정이었지만, 40년 나이차가 지는 젊은 대학원 동기들과 함께 공부해야 하는 고통과 과절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꼈다”며 “과제물이다 수업이다 해서 충분한 수면도 취하지 못하는 ‘강행군’에 시달리며 거의 시간과 과로와 컴퓨터의 노예로 지냈다”고 설명했다.
젊은 동기들이 쉽게 ‘해치우는’ 파워포인트 준비도 벅찼다. 아예 박씨는 파워포인트 준비는 동기들에게 넘기고 대신 두꺼운 원서의 번역을 도맡았다. 나중에 파워포인트에 숙달된 건 물론이다.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남편과는 ‘주말 부부’도 아닌 ‘방학 부부’로 지내야 했다. 학부 시절에는 그나마 격주로 남편이 있는 강원도 원주로 내려갈 수 있었지만, 석사 과정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온갖 우여곡절에도 박씨의 ‘공부욕심’은 꺼질 줄 몰랐다.
사회복지전문대학원엣 국제개발협력 부전공까지 손을 뻗친 박씨는 5학기 동안 63학점을 이수하는 기염을 토하며 석사 논문을 탈고했다. 교우 관계에도 열심이었다.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준비하고, 50대 이상인 동기들과는 친목모임을 조직했다.
졸업을 앞둔 박씨는 내친 김에 박사까지 도전하기로 했다. 해외 유학을 결심했다. 요즘은 GRE 준비에 여념이 없단다. 박씨의 손에는 너덜너덜해진 교재들이 들려 있었다. 60대에 맞는 새로운 도전, 겁나지 않을까. 하지만 박씨는 단호했다. “당연히 힘들겠지요. 하지만 기분이 좋고 기쁨이 넘쳐흐르는 걸 어찌하겠습니까.” ‘공부벌레’에 ‘도전중독’인 박씨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헤럴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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