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루 베이스에서 깨어나라 임수혁 | news | 2008-12-11 |
야구를 향한 그의 열정은 아직 2루 베이스에 있다
대한민국 야구 역사에서 2000년 4월18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슬픈 순간이었다.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의 경기. 2회초 임수혁은 3-유간을 꿰뚫는 타구를 때린다. LG 유격수 유지현은 그 타구를 잡아내 멋지게 1루로 송구했고, 임수혁은 1루에 살아나가기 위해 전력 질주했다. 그리고 세이프.
다음 타석에 들어선 외국인 선수 우드는 초구를 공략해 우익수 앞 안타를 만든다. 1루에 있던 임수혁은 2루에 안착했다. 현재 롯데의 주장인 조성환에게 경기 초반 찬스가 찾아왔다. 조성환이 타석에 들어선 순간, 1루 주자 우드는 갑자기 2루로 뛰어갔다. 동시에 주심은 타임을 선언하고 역시 2루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너나 할 것 없이 2루로 전력 질주했다.
그랬다. 임수혁은 어떤 외부적 충격도 없이 2루 베이스 위에서 그대로 쓰러졌다. 마치 한 그루의 고목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처럼. 경기장에는 제대로 된 의료진도, 구급차도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구급차에 실려 갔지만, 그 후 임수혁은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원인은 심장 부정맥으로 인한 심장마비. 응급조치만 빨랐어도 깨어날 수 있었다는 후속 보도가 들려왔다. 한국 프로스포츠의 안전 불감증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야구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 깨어나라 임수혁 " 을 기도문 외듯 반복했다. 하지만 모두 뒤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그리고 쓰러진 임수혁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일찌감치 스타성을 발휘했던 호랑이
임수혁은 우리학교 재학 시절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대형 포수 유망주였다. 겨우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국가대표 안방 자리를 결코 놓지 않았던 선수였다. 당시 포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파워 넘치는 타격 능력을 갖췄고, 도루도 종종 성공할 만큼 기동력까지 갖춘 전형적인 공격형 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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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혁은 실력뿐만 아니라 인성까지 갖춘 진정한 야구 선수였다. 호탕하고 넉살좋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품어줄 줄 아는 아량까지 있는 그를 동료나 후배들은 매우 좋아했다. 특히 1년 후배이자 배터리였던 이상훈과는 각별한 우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올드 야구팬들은 임수혁 하면 수많은 드라마틱한 홈런을 때려낸 타자로 기억한다. 임수혁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큰 경기를 즐길 줄 아는 선수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88년 정기전 야구 8회초 우리 학교 공격. 임수혁은 1대 4로 뒤진 상황에서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이 겁 없는 새내기 포수는 당대 최고의 왼손투수 조규제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 정기전 역사상 최초의 대타 홈런이었다. 아쉽게 추가점이 나오지 않아 역전에는 실패했지만, 임수혁은 프로에 데뷔하기도 전 야구팬들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확실히 각인하도록 만들었다.
진정한 롯데의 '자이언츠', 임수혁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롯데는 성적으로만 보면 결코 강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팀 마스코트이기도 한 거인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게, 롯데는 꼴지에서 1, 2위를 다투는 시즌이 더 많았다. 심지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시즌조차도 롯데가 전력에서 우위를 보였던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포스트시즌 역대 최고의 명승부를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롯데 경기들이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전력 열세 속에서도 역전극을 만들어내는 부산의 자이언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최동원과 유두열이, 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염종석이 '자이언츠 계보'를 만들었다. 그리고 95년과 99년 그 계보를 이었던 선수가 바로 임수혁이었다.
임수혁은 95년 LG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그 해 20승을 기록하며 한국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던 이상훈을 상대로 역전 결승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 당초 전력 열세로 평가받던 롯데가 플레이오프에서 LG를 잡고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한 데에는 1차전 기선제압에 성공했던 임수혁의 홈런이 컸다. 물론 대학시절 절친했던 두 선수에게는 얄??은 운명의 장난과 같은 순간이었지만 말이다.
99년 임수혁은 야구팬들의 뇌리 한 칸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의 공간을 만들었다. 3대 5로 뒤지던 9회초 1사1루. 호세가 퇴장당하며 텅 비어 있던 그 타석에 임수혁이 대타로 들어섰다. 상대는 그 해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선동렬과 비견되기도 했던 임창용. 그러나 임수혁은 11년 전 잠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우중간 담장을 훌쩍 넘기는 대타 동점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 "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 는 롯데 선수들의 투지를 모두 담아 때려낸 집념의 홈런이었다.
임수혁, 이제 홈으로 들어오라
물론 임수혁의 통산타율은 2할6푼을 겨우 넘어가는 수준이며, 총 7시즌을 뛰는 동안 때려낸 홈런수는 이승엽의 한 시즌 홈런보다도 적은 47개에 불과하다. 대학시절 국가를 대표했던 강타자지만, 프로에서는 4년차 시즌부터는 부상 등으로 명성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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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야구팬들은 임수혁을 지금도 기억한다. 임수혁이 장렬히 쓰러졌던 4월18일과 세상에 첫 발을 내딛었던 6월17일은 야구팬들에겐 기념일과도 같은 날들이다. 롯데의 성적이 조금이라도 부진할 때면, 롯데팬들은 임수혁 플래카드를 야구장에 붙이고 선수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임수혁은 힘든 삶 속에서 야구를 통해 한 줄기 즐거움을 찾으려 했던 야구팬들에게 드라마틱한 멋진 장면을 선물해줬던 산타클로스와 같았다. 야구를 소중히 생각했고, 승리를 향한 열정이 누구보다 순수하면서도 강렬했던 선수 임수혁. 야구팬들은 아직 2루 베이스에 있는 그의 야구를 향한 열정이 홈으로 들어오길 간절히 바란다.
이 글은 고려대학생들이 만드는 스포츠 잡지인 'Sports KU'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선우 기자(정외과 03학번)가 작성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소중한 글을 제공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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