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스라한 간이역의 추억을 좇아 역장이 되다 | news | 2009-06-09 |
오는 이도 가는 이도 거의 없는, 하루에 열차가 몇 번밖에 다니지 않는 간이역. 이 중 189곳은 역무원이 없는 무인역이다. 1960년대부터 이용자가 줄어든 간이역들이 차례차례 무인역으로 변했다. 어떤 데는 기차가 서지 않아 방치돼 있다. 이런 역 31곳에 역장이 생겼다. 코레일은 5일 36명의 명예역장을 임명한다. 다섯 곳은 역장이 두 명이다. 명예역장은 일주일에 한두 차례 나와 역사를 가꾸거나 이용객을 맞는다. 무보수다. 역장 공모에 대학생에서 전직 대학 총장까지 160여 명이 몰렸다. 새 역장들은 “무인역을 사람 냄새 나는 곳으로 바꾸겠다”고 말한다.
양평 아신역 대학생 서준호씨
철도여행 책까지 낸 철도광
철길 너머로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아신역. 중앙선 국수역과 양평역 사이에 있는 간이역이다. 44년 전에 문을 열었고 지난해 무인역이 됐다. 지난해까지 하루 네 편의 열차가 섰으나 올해는 한 편도 서지 않는다. 아신역장 서준호(20·서울 면목동)씨. 인덕대 영어과에 다니는 대학생이다. 서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를 따라 기차여행을 한 뒤 철도에 푹 빠졌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혼자 전국 기차여행을 다녔다. 이렇게 100번 이상 여행을 했다. 그 여행기를 모아 지난해 철도여행 책을 냈다. 인터넷에서 철도동호회를 이끌고 있다. 아신역을 여러 차례 간 적이 있어 역사를 훤히 꿰고 있다.
서씨에게 기차는 오래된 친구 같은 존재다. 간이역에서 혼자 기차를 기다리다 보면 ‘오긴 오는 걸까’하고 겁이 나기도 하지만 친구처럼 예정된 시간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서씨는 “기차가 가지 않으면 절대 가보지 못할 곳을 기차가 들어가기 때문에 가 볼 수 있었다”며 “철도야말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매개체”라고 말한다. 아신역은 지금 역사(驛舍)를 새로 짓고 있다. 내년에 중앙선 복선화 공사가 끝나면 새로 개장한다. 그때가 되면 피로에 지친 도시인을 위한 고향집 같은 장소로 바꾸겠다고 한다.
예천 용궁역 주부 임정녀씨
“사람 냄새 나는 사랑방으로”
경북 예천에 가면 붉은색 기와가 덮인 조그만 역사가 있다. 영주와 김천을 오가는 경북 북부선의 간이역 중 하나인 용궁역이다. 2004년 무인역이 된 뒤로는 무궁화호가 하루 세 번 설 때를 제외하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용궁역 명예역장에 임명된 임정녀(51)씨는 예천 토박이다. 임씨는 “어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논길을 걷다 멀리 들리는 기차 기적 소릴 듣곤 했다”고 말했다. 임씨는 “그때는 모자 쓴 기관사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기관사가 꼭 되고 싶었는데 역장이 됐다”고 말했다. 임씨는 기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한 적은 없다고 한다. 기차로 네 시간 걸리는 부산까지 가 본 게 제일 먼 여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멀리 달리는 기차를 보면 항상 먼 옛날로 되돌아가곤 한다. 임씨는 “그때 들었던 기적 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지만 기차만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용궁역은 경북선의 간이역에 불과한 오지에 있지만 경부선과 영동선과 연결된다. 임 역장의 꿈은 전국의 여행객들을 용궁역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는 “예천엔 육지의 섬으로 불리는 해룡포가 있고 주변엔 박달산이 있다”고 했다. 임씨는 또 “용궁역 바로 옆에는 우시장이 있어 도시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아주 특별한 곳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임씨는 용궁역을 마을 사랑방으로도 활용할 생각이다. 임씨는 “사람 냄새가 배어 있어야 사람이 모인다”고 말했다.
고양 행신역 대학총장 출신 고종성씨
“기차 좋아하는 외손자 위해”
“철도 덕분에 외손자랑 전국을 누빌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코레일이 이번에 임명한 명예역장 중 최고령인 고종성(76·서울 방배동)씨. 서울역에서 교외선을 타고 25분 달리면 닿는 경기도 고양시 행신역의 명예역장이다. 충남 금산의 중부대학 총장을 지낸 뒤 93년 정년 퇴임했다. 고씨가 행신역장이 된 이유는 순전히 외손자 때문이다. 그는 “외손자랑 철도여행을 하다 아예 역장으로 들어앉았다”며 “철도는 나와 외손자 혜준이(9)를 이어줬다”고 말했다. 그는 “나만 역장이 됐지만 혜준이랑 반반씩 역장 노릇을 하기로 했다”며 웃었다. 고씨는 혜준이가 네 살 때부터 서울 시내 전철을 타러 다녔다고 한다. 그는 “그때는 나도 백수고 저도 백수니 지하철을 타고 시간을 보내고 사람 구경도 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혜준이는 열차에 빠져들었다.
혜준이는 서울시내 지하철의 노선별 열차의 모양이나 색깔, 여객 칸의 번호 등을 죄다 외웠다. 서울 지하철이 싫증 날 즈음에 부산과 대전·대구·광주·인천의 지하철 탐방에 나섰다. 물론 도시를 오갈 땐 기차를 탔다. 혜준이는 기차역을 외다가 한글을 깨쳤고 노선별 역명을 순서대로 외울 정도다. 고씨는 “혜준이의 꿈은 기관사가 되는 것”이라며 “내가 먼저 역장을 해본 뒤 역장이나 기관사가 어떤 건지 설명해 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행신역을 남녀노소 따지지 않고 모두 어울려 좋은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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