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기 불편한 길 없나…" 장애인이 직접 점검 나서 | news | 2009-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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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 편의시설 당사자 모니터링에 참가한 박종성(왼쪽), 박순예(가운데), 남성인(오른쪽)씨가 금천구청역길에서 보도를 점검하고 있다./김진명 기자 geumbori@chosun.com |
'당사자 모니터링' 제도
252명 지난 4월부터 활동… 40%이상 곧바로 개선돼
"유모차 끄는 주부 등 교통약자 모두에게 혜택"
"넓은 곳 290㎝, 좁은 곳 188㎝!"
지난 24일 서울 시흥동 금천구청역길 보도에서 숫자를 외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종성(42·지체시각 중복장애)씨가 불편한 손으로 어렵사리 줄자를 쥐고 눈금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 채 보도 폭을 측정해 불러주자, 휠체어에 앉아 몇 발짝 뒤에 서 있던 남성인(42·지체장애 2급)씨가 복창하며 손에 든 '모니터링 결과표'에 수치를 받아 적었다. 다리를 절룩이며 이들을 뒤따르던 박순예(38·지체장애 4급)씨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보도 상태를 촬영했다. 남씨는 직접 자신의 휠체어를 밀어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보도를 꼼꼼히 살폈다. "도로 폭은 휠체어 다니기에 충분할 만큼 넓은데, 저쪽에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이 한 장 깨져 있네요. 그것만 손보면 괜찮겠어요."
세 사람이 나란히 맞춰 입은 파란색 점퍼의 등판에는 하얀 글씨로 '장애인 편의시설 살피미'라고 적혀 있었다. 금천구에 사는 이웃사촌간인 이들은 지난 4월부터 3인 1조를 이뤄 공공기관이나 교통시설을 찾아다니며, 출입구·화장실·엘리베이터·횡단보도·신호등 같은 시설물이 장애인이 이용하기 불편하지 않은지 점검해 왔다. 서울시가 25개 자치구마다 장애인을 배치해 시작한 '장애인 편의시설 당사자 모니터링' 작업이다.
◆시각·지체장애인 3인 1조 현장 점검
서울시가 올해 처음 도입한 '당사자 모니터링'은 장애인이 직접 나서 보도·육교·지하철역·버스정류장 같은 교통시설과 공공기관의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는지 점검하는 제도다. 252명의 장애인을 뽑아 어디에서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 교육한 뒤, 지난 4월부터 7개월 동안 각 구별로 현장을 돌아보며 문제점을 찾도록 했다.
비장애인 도움 없이 직접 이동할 수 있도록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을 한 팀으로 묶어 3인1조 배치가 이뤄졌다. 서울시 이원근 편의증진팀장은 "일반인이 점검하는 것보다 장애를 지닌 분들을 현장에 투입하면 섬세한 시각으로 자신들이 겪을 수 있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장애인 250명이 걸어 다니며 점검한 보도 길이만 총 3740㎞로, 무려 3만7188곳이나 장애인들이 겪을 수 있는 불편요소를 찾아냈다. 법에 규정된 편의시설을 갖추지 않은 경우가 절반쯤이고, 법 규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들이 느끼기에 불편했던 경우가 절반쯤 됐다. 지적된 문제점 중 40%가 넘는 1만6048건은 지적 이후 곧바로 개선이 이뤄졌다.
"여기 원래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이 하나도 없었어요. 저 아래 편 횡단보도의 신호등에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안내기'하고, 파란불이 얼마나 더 켜져 있을지 알려주는 '잔여시간기'가 붙어 있지 않아 불편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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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 편의시설 당사자 모니터링에 참가한 박종성, 남성인, 박순예씨(앞쪽부터)가 금천구청에서 장애인 필기대를 점검하고 있다./김진명 기자 geumbori@chosun.com |
이런 변화가 비(非)장애인에게는 사소하게 보일지 몰라도 장애인에게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모니터링 교육을 맡았던 지체장애인 편의시설 서울지원센터 이희찬 주임은 "비장애인들이 쉽게 피하는 볼라드도 시각장애인들에겐 도로에 널린 '무서운' 존재"라며 "미처 볼라드를 알아보지 못해 정강이를 부딪혀 다치거나 심하게 넘어지는 일도 많다"고 말했다.
장애인들의 '삶의 질'을 좌지우지하는 개선 사례는 이 밖에도 많다. 쪼그려 앉아야 하는 구식 변기밖에 없던 동주민센터에 휠체어도 들어갈 만한 장애인용 화장실이 생겼고, 장애인들이 걸려 넘어지기 딱 좋게 보도 중간에 움푹 파인 웅덩이가 반듯하게 메워졌다. 지난 8월 개장한 광화문광장도 장애인들이 모니터링해 휠체어가 넘기 힘든 보도 턱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서울시는 '당사자 모니터링' 결과를 바탕으로 '장애 없는 보도 디자인 가이드라인'과 '무장애 교통시설 정비기준'을 마련했다. 이 가이드라인에는 모든 보도에 폭 2m 이상 보행 안전구역을 확보하고, 볼라드는 피하기 쉽고 부딪혀도 다치지 않게 길고 가는 고무 봉으로 만드는 등의 조치가 포함됐다.
◆장애인 일자리까지 제공
장애인들이 직접 체험해 고치는 '당사자 모니터링'은 참가 장애인들에게도 희망을 줬다. 장애가 있어 취업전선에서 밀려나 있던 이들이 주 5일을 꼬박 근무할 수 있는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9월 초 참가자 25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96%가 "생계에 도움이 된다"고 했고, 97.6%가 "내년에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금천구에서 조사에 나섰던 세 사람도 장애를 갖고 있지만, 서로 힘을 합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에 멀게는 10㎞ 이상 이동하며 7개월 동안 서울 시내 도로를 누볐다. 희미하게밖에 물체를 못 보는 데다 손놀림도 불편한 박종성씨는 "중복장애를 가진 나에게 '일자리'란 먼 나라 얘기처럼 들렸는데, 이제 매일 일정한 일을 하며 100만원 가까운 월급을 타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어딜 가든 휠체어를 타야 하는 남성인씨는 "내가 열심히 움직여 장애인들의 활동하는 환경을 바꾸었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서울시 한영희 장애인복지과장은 "편의시설 모니터링은 지팡이 짚는 어르신들, 유모차 끄는 주부들처럼 시민 4명 중 1명꼴인 '교통약자'에게 모두 혜택이 돌아가는 일"이라며 "교통약자들이 통행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도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장애인 편의시설 당사자 모니터링에 참가한 박종성씨와 남성인씨가 금천구청역길에서 횡단보도 앞 보도와 시각장애인 유도블럭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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