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받은 희망의 홀씨, 암환자에 퍼뜨려요 | news | 201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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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탭댄스 배우는 재미에 빠져있는 이주실씨는 경쾌한 스텝을 보여줄 만큼 활력이 넘쳤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희망은 참 모질다. 깊은 절망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그 참뜻을 깨닫게 해준다. 배우 이주실씨(67)는 살아있는 몸 자체로 희망의 깃발 같다. 그 모습이 믿기지 않아 때론 결례를 무릅쓰고 묻는 사람도 있다.
“정말 암에 걸렸던 게 맞습니까?” 17년 전 그는 시한부 1년을 선고받았다. 몸서리치는 고통을 이겨낸 그는 요즘 어린이 암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재롱을 떤다. 소년원학교 학생들에게는 마음을 보듬어주는 어머니이자, 선생님이 된다.
앞니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악물고 공부해 지난 3월에는 보건학박사가 됐고 특강 일정이 빡빡하다. 오는 8월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무대에도 선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이 부르면 어디든 달려간다는 그와 만났다. 지난 세월 절망을 사르며 희망을 퍼올린 삶이어서일까. 그의 얼굴은 골목길 햇살처럼 평화로웠다. 소년원 제자들과 얽힌 얘기, 다섯살 된 난소암 여자아이와의 사연 등 감춰진 얘기가 많았다. 출연료 수입이 있든 없든 매달 10군데가 넘는 시설에 후원금을 보태고 있었다. 그의 맏딸은 “엄마, 날개(천사) 달고 싶어서 안달난 거야!”하며 짜증을 내기도 한다. 이제껏 몰랐던 그의 또다른 삶이다.
-실례하지만 선생님의 투병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약간 놀란 표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무리 없을 만큼 건강해요. 의사들은 완치라는 말을 안해주시니까, 암 생존자죠. 1993년 말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는데 임파선과 늑골까지 전이돼 1년을 못 산다고 얘기 들었어요.”
-아팠던 얘기는 지긋지긋하죠.
“맞아요. 그래서 ‘투병’이란 말도 싫어해요. 그냥 ‘잘 놀았다’ 그럽니다. 그런데 가난이 나를 살렸어요.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병원에서 꼭 하라는 것만 했어요. 그래서 약발이 더 잘 받은 것 같아요.”
-뒤늦게 박사학위에 도전한 이유는요.
“이것(박사)을 해서 지금 명사 대열에 낄 것도 아니고, 교수가 될 것도 아니잖아요. 소년원 학생들과 탈북 청소년들의 심리치료를 위한 예술교육을 하면서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느꼈어요. 아이들에게 제대로 도움이 되고 싶어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난 3월 원광대에서 보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통합예술치료가 탈북 청소년의 외상 후 자아정체성, 자아존중감, 자기통제에 미치는 영향(극 놀이를 중심으로)’이다. 2006년부터 3년간 경기 안성의 탈북 청소년 기숙학교에서 자원봉사 예술교사로 함께 생활했다. 이때 수업이 임상실험의 중요한 바탕이 됐다.
-박사과정은 어땠습니까.
“교수님들이 하도 깐깐하게 심사해서 오히려 역차별을 받았어요. 제가 연예인이고, 암 환자인데다가 노인이잖아요. 허투루 심사하면 바깥에서 대학이나 저나 우스운 꼴 된다고 하면서요.”
-이까지 부서졌다는데 정말인가요.
“박사 논문 최종심사에서 세번 퇴짜를 맞았어요. 정말 이를 앙다물고 화장실 갈 때만 빼고 하루 8~10시간씩 꼼짝 않고 매달렸죠. 통과하고 나니까 치아 세곳이 부서져나가고 없더군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어요. 장학금도 한번 받았어요. 젊은 애들 따라가느라 수업시간에 녹음기 몇대씩 돌려가면서 했지만 파워포인트도 할 줄 알았고, 배우로서 암기실력은 괜찮고 해서 크게 무시받을 정도는 아니었어요. 질문을 많이 하니까 교수들이 ‘호기심 천국’이란 별명을 붙여줬어요.”
-예술치료 봉사를 하는데 병이 계기가 됐나요.
“사실 이전부터 공부방이나 소외계층을 찾아다니며 땀 봉사나 정서적 나눔을 했어요. 한 30년쯤 됩니다. 아프면서 꽃동네, 소록도, 기지촌 등에 다닌 일이 더 알려진 거죠.”
-주변에서 선생님 자동차 얘기를 많이 하던데요.
“제 차요…. 가끔 지방 촬영장에서 시동이 안 걸려 현장의 로드매니저들한테 방법을 물었어요. 제 차를 보더니 다들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 서울 벗어날 때는 타고 오지 마세요. 불안해 못 보겠어요’ 하더군요. 연예인들은 밴을 많이 타니까.”
-차에 사연이라도.
“청주의 소년원 아이들과 연극 수업을 할 때였는데 ‘우리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선생님 차 사주자’ 자기들끼리 약속을 해요. 그런데 한 아이가 나중에 중고차 매매시장에 취직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첫 손님으로 지금의 차를 샀죠. 2004년 당시 8년 된 프라이드였으니까 14년 된 차네요. 아직 쓸 만한데 주위에선 바꾸라고 난리죠. 내가 찾아가는 분들이 많이 약하고 힘든 사람들이어서…. 금방은 못 바꿔요.”
-예술치료의 효과는 금방 나타납니까.
“내 눈 앞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면 안됩니다. 그것 자체가 이기적이지요. 그들이 자존감을 회복해 사회에 나가는데 어느 지점에서는 보탬이 되리라 믿는 거죠. 처음에 역할극 하자면 코웃음 치던 아이들이 점점 빠져드는 걸 보면 보람도 느끼고 희망도 갖게 돼요.”
-암 투병 후 배우로 돌아오기가 어땠습니까.
“수술 후 항암치료 하면서 연극 무대에도 서고 영화에도 출연했어요.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라도 일을 했죠. TV에는 2005년 드라마 <황금사과>로 13년 만에 복귀했어요. 그 무렵 재연드라마의 배우로 먼저 섭외가 들어왔지요. 정중히 거절하면서도 나를 이렇게 취급해도 된다고 여기게 된 것일까, 비참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나요.
“암 진단을 받기 전 이혼한 상태였고 두 딸과 살았어요. 병을 안 순간 내 몸보다 두 딸이 걱정돼 슬퍼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항암주사비를 겨우 마련해 병원에 갔는데, 돈이 모자라 어쩔줄 몰라 하던 다섯살 된 난소암 여자아이의 엄마에게 준 적이 있어요. ‘나도 이 주사를 맞아야 사는데, 사는데…’ 주머니 속의 만원짜리를 한참 만지작댔는데 모르는 척 할 수가 없더라고요.”
-국가암정보센터 홍보대사로 활동한다고요.
“특히 소아암 아이들과 만날 때면 더 신경을 써요. 그 예쁜 얼굴들이 고통으로 시멘트처럼 굳어있어요. ‘할머니도 예전에는 아팠는데…’ 다시 건강해져 즐겁게 살고 있는 얘기를 들려주면 빙그레 웃음이 돌아옵니다.”
-매일매일 어떤 마음으로 삽니까.
“내가 힘들었던 때를 잊으면 오히려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그 날들(고통과 싸웠던) 덕분에 산 건데…. 오늘은 내가 그토록 기원했던 하루입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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