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아에 발목 잡힌 여성들이여 날개를 펴라! | news | 2012-08-24 |
‘북아트’로 인생2막 연 여성들 “포기 말고 내길을 만들어가세요”
사회 각 분야에 여성들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여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하지만 그 많던 ‘알파걸’들이 ‘알파우먼’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육아에 발목 잡혀 날개를 접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경력단절여성’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보통 자신의 꿈을 접고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열정의 유전자를 가진 여성들은 그 가운데에도 분주히 새로운 인생 2막을 준비하기도 한다. 북아트 공예가들의 모임인 ‘책숨’도 바로 그런 에너지를 가진 여성들끼리 뭉친 곳이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고지영(41세) 씨는 인테리어 회사 디자이너였다. 결혼과 함께 두 아이를 낳은 뒤 직장과 육아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일을 접었다. 온갖 정성을 쏟아 키운 아들과 딸은 구김살 없이 무럭무럭 커갔지만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슴 한 편의 구멍은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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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아트로 인생 2막을 연 북아트 공예가들의 모임인 ‘책숨’ 구성원들의 작품 |
디자이너의 세계는 트렌드를 읽어내는 젊은 감각이 중요한 분야라서 일을 그만둔 지 여러 해가 된 그가 눈높이에 맞는 재취업 일자리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사회와 연결될 가느다란 끈을 찾아 여러 곳을 기웃거리던 그에게 ‘북아트’가 눈에 들어왔다. 디자인 전공자의 감각과 타고난 손재주가 북아트와 궁합이 잘 맞았다. 내친 김에 가죽공예, 냅킨아트, 스탬프 아트까지 배워 ‘made by 고지영’표 책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모임의 막내인 조원주(32세)씨는 9살, 7살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로 지내면서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틈틈이 팰트와 퀼트 공예를 배우며 자기개발에 욕심을 냈다. 그러다 북아트에 입문하게 되면서 그동안 배운 공예기술을 접목시키며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팰트, 퀼트, 북아트를 결합해 아이들 교구와 책을 직접 만들어보며 기술을 응용했어요. 손기술이라는 게 자꾸 만들어봐야 늘잖아요.”라며 수줍게 웃는다.
체육과 출신의 활달한 최윤성(37세)씨. 아이의 성장 사진들을 모아놓기 위해 직접 앨범을 만드는 등 예전부터 북아트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집 근처에 있는 여성문화회관에 강좌가 개설되자 초급부터 고급과정까지 1년 6개월을 꼬박 투자해 북아트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내친 김에 종이문화재단에서 가르치는 영국식 전통 제본과 오래된 책을 복원·복구하는 방법까지 배우며 마스터자격증까지 손에 넣었다.
“자격증 욕심이 났죠.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해주는 바로미터잖아요. 돌이켜보면 참 억척스럽게 배웠어요. 마스터자격증을 준비할 무렵엔 강사가 더 이상 가르쳐줄 게 없다며 진땀을 빼기도 했지요.”라며 웃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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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죽공예, 냅킨아트 등 다양한 공예기술을 접목해 만든 고지영 씨의 북아트 작품 |
이들의 열정을 눈여겨 본 송파여성문화회관의 강사는 단체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했다. 다들 전문성을 키워 ‘내 일’을 갖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있던 터라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2009년 무렵이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전업주부가 과거 경력을 살려 재취업하기란 녹록치 않다. 이들은 이런 핸디캡을 자격증과 전문 기술로 극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섣불리 공방을 오픈하며 창업전선에 뛰어들기보다는 차근차근 준비하며 특화된 실력부터 쌓기로 뜻을 모았다. 단체 이름은 ‘책에 숨결을 불어 넣는다’는 뜻을 담아 ‘책숨’이라고 붙였다.
대표는 회원들 가운데 유일한 싱글인 이수화 씨가 맡았다. 의상디자이너로 활동하다 북아트에 매료된 그는 프랑스 판지 공예인 ‘까또나루’ 기법까지 섭렵한 실력자였다. “처음엔 스터디에 집중했어요. 각자가 선생인 동시에 제자인 셈이었죠. 다들 특화된 분야의 강점이 있기 때문에 서로 기법을 알려주며 실력을 닦았어요.” 이수화 씨의 설명이다.
매주 각종 재료를 잔뜩 싸들고 모여 여성문화회관의 빈 강의실을 찾아 ‘보따리 장수’처럼 떠돌며 실력을 연마했다. 동대문, 방산시장 등 독특한 재료를 구하러 서울시내 온갖 시장을 누비고 다녔고, 버려지는 재활용품에 아이디어를 보태 근사한 북아트 재료로 활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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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룡을 테마로 만든 유아용 구조북 |
“파지를 재생종이로 만들어 쓰면 질감이 독특해요. 신문지, 휴지 심, 자투리 천처럼 생활 속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도 폭넓게 활용할 수 있지요. 이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리사이틀링 공모전에 출품해 입상하기도 했어요.” 최윤성 씨가 경험담을 들려준다.
억척스러운 노력은 하나둘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제작한 북아트 작품들이 판매되기 시작했고 지인 소개로 다이어리 제작 주문도 들어왔다. 3년간 이들의 활동을 지켜본 송파여성문화회관에서는 사업화 가능성에 주목해 창업준비실 공간을 마련해줬다.
전용공간이 생긴 뒤부터 회원들의 활동은 탄력을 받았다. 매일 창업준비실로 출근해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큐브 스타일로 만든 입체북, 표지를 고급스럽게 만든 가죽 앨범, 미니북 형태로 아기자기하게 만든 유아 교육용 알파벳북 등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예쁜 책들’이 탄생했다.
내공이 쌓일수록 점차 책숨 회원들의 활동 범위도 넓어졌다. “문화센터에 출강해 주부들에게 북아트 기법을 가르쳐 주거나 중고생을 대상으로 학교 CA강사로 활동하기도 해요. 매주 한차례 송파여성문화회관 로비에 판매 부스를 열기도 해요. 연말에는 직장인들 가죽 다이어리 단체 주문을 받기도 하고요.” 조원주 씨가 회원들의 활약상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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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들여 만든 북아트 작품 앞에 선 책숨 회원들(왼쪽부터 최윤성, 조원주, 이수화 씨) |
지난 6월에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도 참여했다. 북아트 디자이너로서 공식적인 데뷔 무대였다. “단독 부스를 마련해 6명의 회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들을 전시했어요. 고생을 많이 했지만 관람객 반응도 좋았고 책갈피, 미니북 등 소품들을 꽤 많이 판매했어요.” 이수화 씨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책숨’이 여기까지 성장하기 위해서 그동안 회원 간 소소한 다툼도 있었고, 노력한 만큼 ‘돈’이 되지 않아 좌절감을 겪는 등 위기의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꾹 참고 이겨냈다. “누구 아내, 누구 엄마가 아니라 북아트 디자이너라는 명함을 내밀며 자립하고 싶었어요. 지난 4년간 고생도 많았지만 덕분에 ‘자신감’을 얻었어요. 이제야 첫 발을 뗀 셈이죠.”
“주위에 보면 이것 저것 배우다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마는 주부들이 꽤 있는데 이왕 시작했으면 하나를 끈질기게 잡고 늘어지며 ‘내 길’을 만들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우리처럼 ‘동지’를 만나면 금상첨화고요.” 최 씨의 진심어린 조언이 이어졌다.
혼자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일들을 여럿이 힘을 합친 덕분에 활동영역을 넓혀가며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책숨 회원들. ‘공방을 내고 싶다’, ‘실력 있는 강사들을 모아 북아트공예협회를 만들어 수강생들을 길러내고 싶다.’, ‘손꼽히는 북아트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싶다.’ 책숨 회원들 각자가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자신들의 미래 모습이다. 책 뿐만 아니라 본인의 인생에도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그들은 에너지가 넘쳤고 행복해 보였다.
공감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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