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돈 없지만 저도 뭔가… 형님, 고맙단 말은 그만

지난 6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종합운동장에서 조상원(52)씨와 강등원(56)씨가 만났다. 신장을 주고받은 사이로 만난 두 사람은 이날 12년 만에 '특별난 재회'를 했다. 이날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장기를 기증한 '기증인' 가족과 '이식인' 가족 150명이 모인 체육대회 날이었다.

강씨는 1989년부터 만성 신부전증을 앓았다. 일주일에 3번씩 한 번에 4~5시간이 걸리는 투석을 해야만 했다. 다니던 여행사도 그만두고, 아내(54)가 보험회사, 부동산 중개소, 학원 등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신장 기증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기증자를 기다리며 신장 투석을 10년째 해오던 1999년 12월 31일, 꿈에 그리던 기증자가 나타났다.

조씨였다. 인천에서 학원을 운영하던 조씨는 IMF 외환 위기 직후 경영난에 빠져 학원 상가를 통째로 경매에 넘겨야 했다. 32평짜리 아파트도 빚 갚느라 그대로 날렸다. 졸지에 '빈털터리'가 됐다. 모든 게 끝인 줄 알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조씨가 다니던 교회 교인들과 친·인척이 십시일반 조씨를 도왔다. 한 교인은 오갈 데 없었던 조씨에게 경남 합천의 한 교회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고, 폐교 옆에 살 거처도 마련해줬다.

 

조씨는 "절망의 나락 같았던 세상이 그래도 참 살 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나도 뭔가 남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을 돕겠다'는 조씨의 생각은 생각으로만 머물렀다. 그럴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조씨 눈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만든 광고가 들어왔다. 즉시 본부에 전화하고 장기 기증을 약속했다. 6개월 후 "당신의 신장을 이식받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보다 이른 연락이었지만, 약속대로 기증하기로 했다. 그런데 가족이 반대했다. "수술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왜 멀쩡한 몸에 칼을 대느냐"는 이유였다. 조씨가 한 달 넘게 "우리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았느냐" "돈 안 들이고도 남을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며 설득했다.

신장 이식은 성공적이었다. 강씨와 조씨 가족은 이식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딱 한 번 만나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조씨는 강씨를 '형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강씨는 이후 '생명의 은인'이자 '아우'인 조씨를 12년 동안 만날 수 없었다.

그동안 강씨는 조씨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한번 찾아가겠다. 집 주소가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말했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다음에 보자"란 말만 들려왔다. 조씨는 "별것도 아닌데 보답하려고 찾아오려는 듯해서 (주소를)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며 "한 달에 한두 번 전화로 형님이 건강하단 말을 듣는 걸로 충분했다"고 했다.

"아이고,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악수 한번 하시죠."(조씨)

"아우님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강씨)

12년 만에 만난 이들은 서로 안부를 묻고 답했다. 조씨는 사회복지사가 돼 충북 영동에서 어려운 이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지역 자활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건강을 회복한 강씨는 "지긋지긋했던 투석 없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어서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이날 강씨와 조씨 두 가족은 꼭 붙어서 점심 도시락을 함께 먹었다. 상대방이 경기에 출전하면 목청 높여 응원하기도 했다.

"이제 자식도 다 컸으니, 우리 자주 좀 봅시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강씨가 말했다. 조씨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강씨의 휴대전화에는 하루 전 조씨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저장돼 있었다.

"저로서는 형님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는 일 외엔 더 바랄 게 없어요. 대신 고맙다는 말은 이제 그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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