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탄은행 지키는 부부, 달동네 겨울을 데우다 | news | 2012-1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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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탄세탁소’ 전병종(오른쪽)씨와 유동님(가운데)씨 부부가 권복순 할머니에게 “인제 따뜻하게 자니까 좋지요?” 라고 묻자 권 할머니가 흐뭇해하고 있다. 권 할머니는 104마을에서도 가장 꼭대기의 방 한 칸과 부엌, 화장실이 딸린 5평(16.5㎡)짜리 집에 혼자 산다. 올겨울을 나려면 연탄 500~600장이 필요한데, 권 할머니는 이날 200장을 배달받았다.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
전병종·유동님씨, 중계동 '104마을'에서 9년째 배달 봉사
남편은 지게지고 아내는 집찾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독거노인·기초생활수급자에 연탄 78만여장 무료 배달
연탄 받은 할머니 "전씨의 연탄은 내겐 생명줄"
"나만 보면 할매들이 얼어 죽는다고, 연탄 갖다 달라고 난리예요. 하하."
20일 오전 9시 서울 노원구 중계동 '104마을'의 백성세탁소 주인 전병종(59)씨의 손엔 다리미가 아닌 목장갑과 팔 토시가 들려 있었다. 그는 시커먼 자국이 얼룩덜룩한 빨간 조끼를 입고 지게를 졌다. 전씨의 아내 유동님(56)씨는 전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할머니, 오늘 배달 가니까 집에 꼭 있으셔야 돼." 이 부부가 세탁소 맞은편에 있던 나무창고를 열자 시커먼 연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서울의 낮 기온은 영상 20도. 아직 겨울이 멀게만 느껴지지만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104마을에선 벌써 겨울 준비가 시작됐다. 1960년대 온 동네의 주소가 모두 '산 104번지'로 끝난다고 해서 '104마을'로 불리기 시작한 이곳엔 청계천 등에서 쫓겨난 철거민이 옮겨와 지금도 판잣집에 시멘트 벽을 바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살고 있다. 불암산 기슭에 있어 겨울에 유난히 추운 이 동네 집들엔 제대로 된 난방시설이 없다. 1600가구 중 600여가구가 연탄을 땐다.
이날 74명의 연탄배달부가 세탁소 앞에 모였다. 초등학생 아들과 온 아버지도, 부부끼리 온 사람들도, 온 가족 6명이 함께 온 가족도 있었다. 서울축산농협을 다니는 직장인들도 동료끼리 이곳을 찾았다. 전씨는 이 중 최고참 배달부다. 대부분 2.4㎏짜리 연탄 4장을 지게에 올려 배달에 나섰다. 이 동네는 길이 워낙 좁아 차는 올라갈 수 없고, 노인들이 대부분이라 집안 연탄장 안까지 배달은 오로지 '지게 운반'만 가능하다. 지게가 가지 못할 정도로 좁은 길에선 배달부들이 일렬로 늘어서 손에서 손으로 연탄을 옮기기도 한다.
전씨의 아내 유씨는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지게를 진 연탄 배달부들이 헉헉 대며 가파른 길을 올랐다. 세탁소에서 큰길을 따라 올라가다 왼쪽으로 난 가파른 골목길을 10분 정도 올라가자, 성인 남성 1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비좁은 길이 나왔다. 이 길 깊숙이 권복순(78) 할머니의 5평 남짓한 집이 있다. 권 할머니의 연탄장엔 연탄이 한 장도 없었다. 권 할머니는 "늙은 할매 얼어죽을 뻔했어. 봄부터 연탄이 떨어져서 아주 곤란했어"라고 했다. 연탄장에 연탄이 가득 쌓이자 권 할머니가 싱글벙글 웃었다. "몸이 아파서 넉 달간 고생했는데, 이제 따뜻하게 자겠어." 전씨는 "할매, 아끼지 말고 연탄 때고, (연탄) 떨어지면 세탁소로 바로 와"라며 "혼자 살아도 억지로라도 밥 잡숴야 해. 알았지?"라고 했다. 유씨는 권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이들은 이렇게 연탄을 배달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살폈다.
전씨 부부의 세탁소는 백성세탁소란 상호보다 '연탄세탁소'로 더 유명하다. 2004년 서민들을 위해 기업이나 개인후원자들이 연탄을 기부하면, 이 연탄을 시민 봉사자들이 날라주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연탄은행의 '서울지점'이 바로 이 동네에 들어서면서, 이 부부가 줄곧 '연탄배달 사령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탁소 맞은편 공터를 연탄 창고로 제공했다. 연탄을 저장해놓는 이곳 창고는 서울연탄은행의 '금고'와 마찬가지다. 2004년 겨울부터 현재까지 이 연탄 금고를 거친 연탄은 총 78만5374장. 25만명의 시민 자원봉사자가 '배달부'로 나서 연탄을 날랐다. 올겨울 시즌은 지난 6일 시작됐다. 400명의 배달부가 1만2000장을 혼자 사는 노인, 기초생활수급권자들에게 배달했다.
전씨는 "서울연탄은행과 자원봉사자, 기부자들이 104마을의 겨울을 따뜻하게 만든 것"이라며 "나는 한 게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부부는 주민들로부터 연탄 신청을 받고, 배달 날엔 전씨는 직접 지게를 지고, 유씨는 길 안내를 한다. 손금처럼 복잡한 이 마을에 누가 어디에 사는지, 누가 연탄이 없는지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이 부부밖에 없다. 이날 연탄을 받은 정분님(74) 할머니는 "전씨가 갖다 주는 연탄은 나에겐 생명줄"이라고 말했다. 한 장에 500원인 연탄값도 이들에겐 부담이고, 무엇보다 이 값에 달동네까지 연탄을 배달해 줄 연탄업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부가 햇수로 9년째 연탄 배달 봉사를 한다. 이들이 그동안 연탄은행 운영 규정을 어긴 적이 딱 한 번 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아픈데, 차가운 방에 며칠째 누워 있으니 제발 연탄을 달라'고 찾아온 50대 아들도 있었어요. 마음이 너무 아팠죠. 순서가 정해져 있는 거라서 어쩔 수 없는 건데…. 처지가 너무 딱해서 창고에서 6장을 꺼내줬어요."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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