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살까진 아이들과 뒹굴 것… 유치원 떠나는 순간 더 이상 내가 아닐 테니까

"제 나이 올해 여든여섯. 선생으로만 65년을 살았죠. 이젠 떠날 때도 됐다 싶지만 아흔까진 아이들과 함께하려고요. 이곳을 떠나는 순간 내 삶은 바스러질 테고, 저는 더 이상 김득실이 아닐 테니까요(웃음)."

김득실(86) 백운유치원(서울 노원구 상계동) 원장에게 나이 '86'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김 원장은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소속 89개 유치원 원장 중 최고령자. 하지만 매일 오전 9시면 출근해 책상에 쌓인 서류를 확인하고, 증손자뻘 되는 원생들과 볼을 비비고, 잡다하게 어질러진 물건들을 정리하다 오후 6시면 퇴근한다.

교육 방식도 독특하다. 매주 1회 아이들에게 김 원장은 한자를 직접 가르친다. 영어 가르치는 유치원은 차고 넘쳐도 한자 가르치는 곳은 드물다. "숫자, 요일, 부모 이름, 산과 시냇물 등 쉬운 것부터 알려줘요. 그러면 아이들은 큰소리로 따라 읽으면서 삐뚤빼뚤 글자를 그리지요(웃음). 소리글자인 한글과 달리 한자는 뜻글자여서 글자 하나에 숫자와 신체 기관과 감정 등이 혼합돼 들어 있어요. 그래서 한자를 알면 인간사 세상만사를 앉아서 깨치게 되고, 글자를 반복해서 쓰면서 산만했던 주의력도 바로잡을 수 있지요."

모든 원생에게 태극기와 무궁화를 그리게 하고, 애국가를 외게 하는 것도 '할머니 원장님'의 몫이다. 어릴 때부터 대한민국 사람이란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김 원장은 "졸업식 때 아이들은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부르는데 오히려 엄마들이 못 부르는 경우가 많다"며 웃었다.

황해도 사리원 출신인 김 원장은 원래 초등학교 교사였다. 열세 살에 경성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해 졸업하자마자 교편을 잡았다. 6학년 담임만 맡으면 제자들을 명문 학교에 진학시켜 엄마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1978년 스카우트되어 간 사립초 재단 관계자들이 그에게 대학 유아교육과 강사로 자리를 옮기라고 압력을 넣으면서 진로가 바뀌었다. 다행히 재미있고 보람 있었다. "초등교사는 교과 지식을 가르치지만 유치원 교사들은 오줌 싸고 토한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보듬고 키우더라고요. 나도 3남매를 키웠지만 아이들을 진짜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된 거죠." 김 원장은 같은 해 서울 중구 퇴계로에 직접 유치원을 차렸고, 10년 후 자리를 옮겨 지금의 유치원을 개원했다.

상계동에서만 25년째이니 그의 품을 거쳐 간 원생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다시 돌아온 경우도 있다. "2년 전 다섯 살짜리 애 엄마가 자기도 이 유치원을 졸업했다면서 인사를 해요. 아유, 어찌나 반갑던지."

두 세대 이상 차이 나는 요즘 엄마들의 교육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아는 게 너무 많아 탈이죠(웃음). 다 좋은데, 그러다 보니 교사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교사들 실수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걸 학부모가 일일이 따지고 들 게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화로 풀어가야 해요. 그래야 교사도 발전하고, 아이 또한 부모와 교사를 존경하는 법을 배웁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딸기 한 바구니가 쑤욱 들어왔다. 1년 전 미국서 잠깐 귀국한 손주들을 이곳에 맡겼던 전계숙(73)씨. 전씨는 "아이들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기 가방을 메고 다닌다"면서 김 원장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