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인 날 알아보지도 못하지만 집사람 노래 다시 들으니 설레"

'치매 극복의 날'인 지난 19일, 서울무역전시장에서 '치매 극복 실버합창대회'가 열렸다. 치매 환자가 아닌 60세 이상 일반인으로 구성된 12팀의 공연이 끝나고 특별무대가 마련됐다. 할아버지·할머니 12명과 대학생 14명이 노래하고 가수 '여행스케치'가 통기타로 반주했다. 노래 제목은 '당신을 기억해요'. 여행스케치 조병석(48)씨가 만든 '치매 극복송'이다. '소중한 기억과 아름다운 사랑을 잃을까 이젠 더 이상 겁내지 말아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매일 함께 웃어요.'

합창단 실력은 형편없었다. 석 달 동안 연습한 곡이지만 더듬더듬 입을 벌리는 할아버지·할머니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옆에 선 대학생을 빤히 쳐다보거나 박자를 놓쳐 어색하게 미소짓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옆 사람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드는 손짓만은 힘찼다. 지휘자는 없었다. 단장 이윤진(49)씨가 지휘석에 섰지만 한 일은 박수를 쳐준 것뿐이다. 합창단 이름은 '힐링하모니', 치매 노인 8명과 그들의 배우자 4명으로 꾸려진 '치매 합창단'이다. 관객 300명은 이 형편없는 노래를 들으며 한껏 응원해줬다.

힐링하모니는 지난 6월 만들어졌다. 멤버는 서울 동대문구 치매지원센터에 다니는 노인들이다. 남편·아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누가 음악을 가르칠 것인가. 나선 사람은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이윤진씨다. 어머니(86)가 센터에 다닌다는 인연 하나 믿고 '도와달라'는 센터 측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연습은 매주 목요일 오후 1시간씩 했다. 이씨는 '내가 이 시간에 애들한테 피아노 가르치면 버는 돈이 얼만데'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고 한다. 장맛비 쏟아지던 7월 어느 날, 이씨는 '비가 이렇게 오는데 노인들이 얼마나 오겠느냐'고 생각하며 어머니를 집에 남기고 연습실로 갔다. 바로 돌아올 요량이었다. 그러나 연습실에는 어머니를 뺀 모든 단원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앉아 있었다. "돈 생각을 해온 저를 반성했어요."

3개월의 연습은 단장 이씨에겐 인내심과의 싸움이었다. 단원들은 음을 익히고 박자 맞추기를 버거워했다. 똑같은 수업을 수십번 해야 했다. 신경이 예민한 치매 환자들은 연습하다가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음 연습 땐 싸운 사실도 잊은 채 서로 손잡고 노래했다. 이씨는 "모두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여럿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우리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공연이 있던 날, 객석에는 치매 2년째인 육정기(78)씨의 딸 영화(45)씨가 꽃다발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는 "노래 부르는 걸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무뚝뚝한 아버지가 해맑은 표정으로 합창하시는 걸 보니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치매 진단을 받은 뒤 부쩍 우울해진 아내 강영자(75)씨를 데리고 합창단에 참여한 김응서(86)씨는 "젊은 시절 '소양강 처녀'를 맛깔나게 불러 나를 설레게 했던 집사람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3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김진찬(62)씨는 공연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남편 김용길(70)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우리 이제 공연하러 가는 거예요?" 37년이나 같이 산 남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답했다. "아가씨, 1시간 전에 공연은 끝났어요. 집에 가서 저랑 한 곡 더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