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직장 다녀오겠습니다.” “애비야, 잘 다녀와.”

출근길 인사에 아버지는 늘 그렇듯 “애비야, 잘 다녀와.”라고 답하신다. 매일 아침 주고받는 단순한 대화 같지만 아버지와 내가 나누는 가장 정감어린 대화이다. 이 말마저 건네지 않으면 나는 하루가 편치 않다. 아마 아버지도 나와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싶다. 부자지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어버이날은 평소처럼 보냈다. 하지만 나는 벌써 지지난주에 아버지께 어버이날 일정에 대해 여쭸다. 그날은 경로당을 찾는 어린이집 두 곳이 있어 부득이 이번에는 경로당 어르신들과 함께 자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은 나 대신 고사리 손들이 직접 만들어 달아줬다. 가족이 함께 하는 식사도 다음 주말로 잡았다.

어버이날 선물은 뭘로 드릴지도 여쭸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받쳐 입을 옷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너무 빨리 답해 조금은 당황했지만 한 가지 고민은 쉽게 덜었다. 나는 이렇듯 아버지와 아침 식탁에서 매일 소소한 얘기를 주고 받는다.  

아버지(오른쪽)와 나. 개인적으로 아끼는 사진이다.

대화를 건네는 쪽은 나, 아버지는 주로 답변하는 편이다. 나는 집안 일을 결정할 때 될 수 있는 한 아버지 견해를 듣는다. 아내는 내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나이에도 아버지께 항상 묻는 것에 내심 불만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게 내가 아버지를 편하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개중에서 가장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대화는 아버지의 고향인 이북에서의 어릴 적 추억담들이다. 나는 아버지의 피란 시절과 전쟁통 입대 후 20년 가까운 군대시절 이야기를 시도 때도 없이 꺼내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지겨울 법도 한데 아버지는 그 때마다 동화구연을 하듯 생생하게 들려준다. 또 비록 가난했지만 엄마와 고생하면서 우리들을 키우던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이처럼 내가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대화를 유도하는 것은 아버지의 건강 때문이다. 말을 걸고 이에 반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건강상태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도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인간적인 솔직한 면모도 드러난다. 효도는 거창한 게 아니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존재감을 확인시키고 외롭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은 경로당을 찾은 어린이들이 직접 만들어 달아드렸다.

 
여든 중반을 넘긴 아버지는 지금도 외부 활동이 왕성하다. 월남 피난민 1세대 모임인 미수복 경기도 개풍군 애향 활동은 물론 지금 사는 서울 독산동에서 바르게살기협회 등 유관단체에서 원로로 활동하고 있다. 당신께서 손수 써 관리하는 달력을 보면 하루 일정이 빼곡하다.

올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23년이 되는 해다. 그 당시 아버지 연세는 나와 비슷한 60대 초반,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금세 재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그런 추측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버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혹시나 그 때 아버지는 내가 재혼을 권해주길 바라셨는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여름 아버지가 어머니 묘소를 찾아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 묘소를 자주 찾는다. 거기선 둘만의 대화를 나눈다. 어머니 덕에 우리 가족이 잘 있어 고맙다는 말을 꼭 건넨다. 이를 보면서 자식은 쉽게 부모를 잊지만 부부는 그렇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다. 사실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 묘소를 찾지 않은 게 한두 번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그간 아버지에게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그 때마다 나와 집사람은 아버지 병상을 지켰다. 심장병에 갑자기 쓰러져 심장수술과 응급치료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고혈압, 당뇨병 등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약을 많이 드신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직 정정하시다. 지금까지 자세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오히려 나보다 더 냉철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편이다. 평생 자기 관리에 엄격한 결과이다. 

아버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북에 부모와 형제들을 남겨두고 월남해 작은 아버지와 단 둘이 이남에 정착했다. 형제는 외로움과 눈물을 달고 살았다. 지금도 파주 통일전망대에서 이북을 바라보면 아버지 고향 개풍군 임한면이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아버지가 애타게 고향을 그리며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이유다. 나 또한 그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숙부 생신 모임 때 참석한 아버지(가운데).

 
생각해보면 아버지만큼 박복한 사람도 드물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기 5년 전에는 막내가 결혼을 앞두고 사고로 죽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마저 아버지 가슴에 회한을 남겼다. 내가 암에 걸린 것이다. 벌써 10여년 전 일이다.  

위암에 걸렸을 때 제일 먼저 아버지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위암을 극복하기도 전에 대장암과 전이된 폐암으로 투병할 때 아버지는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 것이다. 아마 내가 죽을 것이라는 공포감에 아버지는 무척이나 괴로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의사도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살아났다. 이제는 아버지에게 더 이상 괴로운 일이 없기를 빌고 있다. 

우리집은 아버지와 나, 아내와 두 아들, 3대가 한지붕에서 살고 있다. 얼핏 번거로울지 모르지만 집안 대소사를 아버지께 물어보고 결정하는 분위기와 전통이 있다. 그렇다고 고리타분한 가부장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아버지 또한 일방적으로 말씀하는 적이 없다.  

지난해 아버지 생신 때 얼마 안되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했다.

특히 아내가 시아버지를 챙기고 그걸 아이들이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어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나 또한 이런 분위기에서 나름의 어른 대접을 받고 있다. 주변을 보면 3대가 함께 하는 가정이 많지 않다. 어르신이 계시더라도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는 눈치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다르다. 연로한 아버지 덕에 가족의 소중함을 매일 느끼고 있다.  

인생 100세 시대이다. 86세 아버지와 환갑 자식이 함께 사는 우리 집안 풍경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에 국가와 사회에 진정한 어른이 없다고들 말한다. 이는 그만큼 어른의 역할에 대해 무관심하고 홀대한 결과이다. 우리집의 어른은 어디까지나 아버지다. 아버지가 계시기에 우리 가족은 각자 소임을 다하며 즐겁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 주기를 염원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아버지, 직장 다녀오겠습니다.”라며 집을 나선다.

공감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