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초 서울 성북구 길음2동 마을 한구석에서 3개월 된 암컷 강아지가 버려진 채 발견됐다.

길음동 일대는 몇몇 아파트 단지를 빼고 모두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뉴타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최근 몇 년 새 마을엔 빈집이 늘어났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반려동물만 덩그러니 남겨지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한 주민의 신고로 이 유기견은 길음2동주민센터로 오게 됐다. 밤송이처럼 작고 야윈 강아지는 파보장염을 앓고 있었다. “유기견보호센터에 가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민센터 직원들과 주민들이 십시일반 치료비 120만원가량을 모았다. 수술을 받고 동주민센터 안에서 회복하는 동안 강아지는 특유의 재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 마을 ‘사회복지공무견’으로 발탁됐다. 이름은 길음동에서 기르는 강아지란 뜻에서 ‘기르미’가 됐다. 기르미가 가면 사람들이 웃었고, 기르미를 보러 사람들이 모였다. 서로를 보듬은 길음2동 사람들과 기르미의 인연은 사계절을 지나 두번째 맞은 가을처럼 깊어가고 있다.

지난해 7월 파보장염 치료 중인 기르미.


■ 국내 첫 사회복지공무견이 되다

“견공계 최초 사회복지공무견으로 임용합니다.” 지난해 7월28일 길음2동주민센터에서 ‘기르미 임용장 수여식’이 열렸다. 기르미가 ‘인턴’ 딱지를 떼고, 명예공무원으로 인정받은 날이었다. 국내에서 공무견으로 임용장을 받은 건 기르미가 처음이다. 기르미의 자질을 알아본 건 홍동석 성북구 행정지원과장(58·당시 길음2동 동장)이었다. 기르미는 주민센터를 찾아오는 주민들을 잘 따랐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상의 끝에 기르미를 주민센터에서 기르기로 하고, 역할을 부여했다.

기르미는 공무견이 된 뒤 오전 9시에 출근해 일주일에 2~3번 복지사들과 함께 홀몸노인들의 집을 방문했다. 집에만 있던 노인들이 기르미 간식을 준비해두거나 골목길로 마중을 나왔다. 이선주 보건복지지원팀장(53)은 “기르미가 정말 친화력이 좋고, 강아지 때라 귀여웠다. 복지사들과 같이 방문하면 홀로 지내는 노인분들이 먼저 인사하고 반겼다”고 했다. 홀로 사는 이판례 할머니(80)는 기르미의 팬이다. 다리가 불편한 이 할머니는 기르미가 오면 외롭지 않아 좋다고 말하곤 했다.

지난해 8월 길음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웃음치료’에서 보조강사로 활동 중인 기르미.

길음2동주민센터 앞에서 유치원에 가기 위해 통학차량을 기다리던 아이들이 강아지가 온 뒤로는 주민센터 안으로 들어와 깔깔거렸다. 동장이던 홍 과장은 기르미를 데리고 마을 안전순찰도 돌았다. 기르미가 주민센터 안에 있을 땐 방과후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아이들이 찾아와 함께 놀았다. 홍 과장은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딱딱한 관공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꾸는 게 기특했다”고 말했다. 동주민센터에선 지난해 3~10월 매주 수요일마다 ‘웃음치료’ 강좌가 열렸는데, 기르미는 보조강사로도 활약했다.

지난해 9월5일 오전 유치원에 가기 전 길음2동주민센터에 있는 기르미를 보러 온 아이들과 주민.

올해 1월 기르미는 동주민센터에서 바로 옆 창고에 마련된 새집으로 이주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주민들도 배려하고, 기르미가 어른 개가 되면서 주민센터 사무실보다는 별도의 집에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기르미는 동네 주민이 기르미와 친구하라며 주민센터에 맡긴 ‘백구’와 이웃해 살았다. 기르미와 백구는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기르미와 백구의 집은 두 평 남짓한 작은 컨테이너로, 동네 주민이 만들어줬다.

기르미와 놀고 있는 아이들.

주민센터 직원들은 올봄 기르미의 신랑감을 찾아나섰지만 마땅한 배필을 찾지 못했다. 지난 6월 어느 날 기르미 집에 흰색 수컷 개 한마리가 나타나 같이 살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기르미와 살고 있는 개의 주인을 찾습니다”라는 공지를 띄워 동네에 알렸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수컷 개는 일주일가량 기르미 집에 머문 뒤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어미가 된 기르미는 “출산 휴가 중”

수컷 개가 떠난 뒤 기르미는 예민해졌다. 잘 따르던 주민들을 만나도 애교 없이 짖기만 했다. 7월 초엔 기르미를 알뜰살뜰하게 챙기던 홍 과장이 구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직원들과 주민들은 기르미가 걱정이었다. 그러다 지난 8월4일 기르미는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이날 직원들과 동네 사람들 몇몇이 모여 기르미의 출산을 응원했다. 휴가 중이었던 홍 과장도 달려와 기르미의 출산 과정을 지켜봤다. 이날 오후 1시40분부터 오후 5시 사이, 다섯마리의 강아지들이 차례로 얼굴을 내밀었다. 기르미의 출산 소식이 전해지자 미역국을 끓여오는 주민도 있었고 부쩍 야윈 기르미를 위해 간식을 가져다주는 주민들도 있었다.

지난 6일 서울 성북구 길음2동주민센터 옆 창고 마당에서 기르미와 기르미가 낳은 강아지들이 놀고 있다.

지난 6일 기르미와 다섯마리의 강아지를 만나러 길음2동주민센터를 찾았다. 요즘 기르미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는 박은수 주무관(53)은 “기르미는 지금 출산 휴가 중입니다. 새끼들을 키우는 임무를 하고 있습니다”라며 웃었다. 새끼들은 밤색 털을 가진 기르미와 달리 흰색 털을 가졌다. 강아지들 곁으로 다가가자 기르미가 경계하듯 달라붙었다. 박미선 주무관(32)은 “기르미가 모성애가 강해서, 제 앞에 놓인 간식도 새끼들에게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주민들에게 기르미는 때로 ‘시끄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다섯마리 강아지를 낳기 전후로 예민해진 기르미는 낯선 이가 나타나면 크게 짖었다. 박은수 주무관은 “밤에 강아지 다섯마리가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기르미가 짖으면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한다”고 했다. 두 달이 지난 요즘은 기르미도 점차 평상심을 되찾고 있다.

기르미가 홍동석 성북구 행정지원과장(전 길음2동 동장·왼쪽)과 길음2동 골목을 돌며 순찰활동을 하고 있다.

기르미가 낳은 다섯마리 강아지들은 대를 이어 공무견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주민들의 분양 문의도 있었지만 동주민센터 직원들은 논의 끝에 기르미 새끼들이 독립해서 공무견으로 활동하는 게 좋겠다고 뜻을 모아 관공서에 분양하는 것을 우선하기로 결정했다. 기르미를 ‘동료’로 생각하는 동주민센터 직원들은 직원상조회비에서 기르미 사료값을 충당하고 있다. 새끼를 낳기 전엔 월 10만원 안팎이던 비용이 최근엔 30만원가량으로 늘었다. 휴일이나 명절에도 당번을 정해 기르미 식구들에게 밥을 주러 동주민센터에 나온다. 홍 과장은 발령이 난 뒤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 기르미를 만나러 동주민센터를 찾는다. “기르미가 있어서 하루 몇분씩 우리도 잠시 쉬고 스트레스를 푼다”는 게 직원들의 이야기다.

■ 마을은 기르미를 돌보고, 기르미는 마을을 돌본다

기르미 나이는 현재 1년6개월. 잡종으로 성격은 온화하고 친화적이다. 외출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며 영리한 편이다. 기르미의 이력을 보면, 일본의 치료견 ‘치로리’가 연상된다. 1992년 도쿄의 한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치로리는 치료견 전문가 오오키 도루의 훈련을 받은 뒤 13년간 여러 환자들에게 기적 같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후 일본에서는 동물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통해 정서적·심리적 안정과 신체적 발달을 촉진시키는 이른바 ‘동물매개 활동’이 활발해졌다. 서울시도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 전환 등을 위해 반려동물을 키우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동물매개 활동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8월 기르미가 다섯 마리 새끼를 낳은 후 길음2동주민센터 직원들이 강아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 성북구 길음2동주민센터 제공

기르미의 향후 임무는 공무견으로서 마을을 돌보는 일이다. 김남규 길음2동 동장(59)은 “지난 7월부터 이 마을에서 일하게 됐는데 기르미가 동네 주민들한테 즐거움을 주는 것 같더라”며 “새끼들을 분양한 이후엔 이전처럼 주민들도 만나고 안전순찰도 함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장기간에 걸친 뉴타운 찬반 문제로 주민들이 오래 다퉜다. 철거를 앞두고 사람들이 떠났고, 텅 빈 마을처럼 사람들 마음도 헛헛했다고 한다. “개가 있으면 한번 더 보게 되잖아요. 동주민센터에 개 한 마리가 있으니까 간식도 가져다 주고 그랬지요.” 주민 이모씨(69)는 기르미가 특별한 것은 없지만 마을의 명물이 됐다고 했다.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할 공동 관심사가 생겼다는 이야기다.

직원들은 기르미의 ‘복직’을 기다리고 있다. “동네방네 뛰어다니던 기르미가 복직하면, 기르미를 좋아하는 어르신들이나 아이들이 같이 웃겠죠.” 기르미와 길음2동 사람들은 알콩달콩 ‘마을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