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대구 북구 대현동 자택에서 박정열 교사가 제자들의 사진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대구 영화학교 박정열 교사

“남들은 듣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을 안쓰럽게 여길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한없이 자랑스러운 제자들입니다. 음악 소리를 듣지는 못하지만 소리의 울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음악에 맞춰 사뿐사뿐 춤을 추던 아이들과 함께했던 지난 40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의 재산입니다.”

지난 5일 대구 북구 대현동 자택에서 만난 박정열(68) 교사는 대구의 청각 장애 학생 교육전문기관인 영화학교에서 40여 년 동안 열정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친 후 2009년 퇴직했다. 박 교사는 1986년 영화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모아 청각 장애 학생들로 구성된 ‘소리예술단’을 만들어 꿈과 끼를 키우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는 “청각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감정을 표출할 길이 별로 없다”며 “무용으로 학생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청각 장애 학생들에게 음악과 무용을 가르친 이유를 밝혔다. 박 교사의 청각 장애 제자 중에는 언어 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는 “소리를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박 교사는 듣지 못하는 예술단 학생들에게 북을 쳐서 진동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박자를 가르치고 손동작으로 리듬을 가르쳤다. 그는 “내가 북을 치면 학생들이 북의 울림에 따라 걷고 뛰면서 박자를 배웠다”며 “박자를 익힌 학생들에게 무용 동작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연습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청각 장애 학생들은 음악 한 곡을 배우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학생들은 완전히 박자와 리듬을 익힌 곡도 며칠만 연습하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렸다. 수개월씩 이어지는 연습기간에 일부 학생들은 지치고 힘든 마음에 포기하거나 도망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박 교사는 학생들의 손을 잡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장애를 딛고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 교사의 기대에 부응하듯 학생들은 점차 음악과 무용에 익숙해져 갔다. 예술단 학생들은 ‘학교종’ ‘고향의 봄’ ‘우리의 소원’ ‘앞으로’ 등의 노래를 어눌한 발음으로 부르기도 하고 삼삼오오 어울려 안무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음악과 춤이 주는 힘은 대단했다”며 “안무가 차차 자리가 잡혀가니 나도 신이 나고, 아이들도 신이 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생들은 노래와 춤을 연습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재능과 가능성을 발견하며 기뻐했다.

예술단 운영을 시작한 뒤 박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연습하느라 밥 먹듯 야근을 했다. 주말 근무를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는 “정규 시간 외 근무에 대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워 추가 근무를 자처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예술단원들의 무용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됐다. 그는 “노래와 춤이 따로 놀 정도로 형편없던 단원들의 실력이 일선 대학의 무용과 교수들이 감탄할 정도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소리예술단의 우수한 무용 실력에 관한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져 박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공연하러 다니기도 했다. 예술단의 공연을 관람한 학생들은 공연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특히 예술단의 공연은 같은 처지의 장애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다. 예술단은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 공연 등을 비롯해 국내외 각종 행사에 참가했다. 박 교사는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남강 교육상, 2009년 홍조근정훈장을 각각 수상했다.

박 교사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장애 학생을 가르치는 특수교사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특수교육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성직자로 장애 학생들을 남달리 돌보던 부모님과 특수교육에 종사하는 친척들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장애 학생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장애 학생들과 웃고 뛰어다니며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며 “장애 학생들을 부모처럼 아껴주는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특수교사 일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막상 교직에 들어선 후 박 교사에게 닥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박 교사는 “청각 장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라고 소개하면 다짜고짜 ‘당신도 벙어리가 아니냐’고 놀려대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자신이 곤욕을 치르는 순간에도 제자들이 ‘장애인으로서 얼마나 많은 놀림과 차별을 당했을까’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박 교사는 40년 특수교사 생활을 마치고 퇴직한 이후에도 제자들과 꾸준히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코 흘리며 배우던 꼬맹이들이 어느새 성인이 되어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사회인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부모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지금도 장애 학생들에 대한 걱정에 여념이 없다. 그는 국가에서 장애인 예술단을 만들어 지원하기를 희망하며 각계각층에 호소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사회가 제자들의 재능을 수용하고 키워주지 못한다.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장애인 예술단 건립을 위해 꾸준히 노력할 생각이다. 그는 “장애인들이 학교에서 배운 재능을 이어나갈 통로를 마련해줘야 한다”며 “애써 익힌 학생들의 재주가 써먹을 곳이 없어 움츠러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