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소녀가장 후원 헌혈 500번 680명 독거노인 돌보기 봉사가 삶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서울 강동소방서 전상기 소방관의 직장 동료인 손문종 소방행정과장의 말이다. “전상기 소방관은 평소에도 묵묵히 주어진 일에 열심인 사람입니다. 혼자서 그런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 언론의 연락을 받고서야 알았습니다. 우리 소방서에 이런 훌륭한 분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동료들의 칭찬에도 “별것도 아닌 일인데 알려져서 부끄럽다”고 말한 전상기 소방관은 국민대통합위원회에서 선정한 ‘2015 생활 속 작은 영웅들’ 중 한 명이다. ‘작은 영웅’이라고만 이름 붙이기엔 전상기 소방관이 해온 일이 결코 작지 않다. 1981년부터 지금까지 약 500번의 헌혈을 했다. 솔직히 헌혈은 한 번 하기도 어려운 게 아닌가. 1991년부터는 7명의 소년소녀가장을 후원하고 있다. 1996년부터 10년간은 680명의 독거노인을 찾아 돌봤다. 이들 중에는 사회복지사도 파악 못할 정도로 복지 사각지대에 있던 극빈층 노인도 있었다.

지금은 소방관 근무가 3교대로 이뤄지지만, 당시는 격일제였다. 24시간 근무하고 나면 24시간 쉬는데, 전씨는 그 시간을 이용해 독거노인들의 집을 찾았다. “1995년 즈음에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독거노인에 대해 방송하는 것을 봤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몰랐지요. 근처 복지관 한 곳을 찾아가 물어봤습니다.” 그곳을 통해 소외된 채 지내는 독거노인들을 알게 되고,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됐다. 지금은 성동구와 광진구 등에 있는 4개의 복지관에서 이웃의 정보를 얻는다.

“독거노인들을 돕다 우연히 소년소녀가장과도 인연이 닿았습니다.” 전씨가 성동소방서에서 근무할 때였다. “구청에서 준 독거노인 명단을 보고 찾아갔는데, 중학생 남매가 어렵게 생활하고 있더군요. 노인들만큼이나 청소년에게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후원하는 소년소녀가장에게 매달 10만원씩 보낸다. 돈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학용품이나 신발, 간식거리도 챙겨준다. 도움을 받은 학생 중 하나는 얼마 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청소년에 대한 후원은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소년소녀가장을 많이 만나다 보니 알게 된 것인데, 아이들은 오히려 대학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싼 대학 등록금에 취업 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러는 대학을 그만두고 직장을 구하지 못해 더 어렵게 살기도 한다. 전씨는 “소년소녀가장은 성인이 됐을 때도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무공훈장 엿 바꿔 먹던 철부지

전상기 소방관이 ‘작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 전경원씨의 도움이 컸다. 전씨의 아버지는 경북 문경에서 밭농사를 하며 의용소방대 일을 하던 분이다. “당시 면 단위의 작은 시골에는 소방서가 따로 없었습니다. 불이 나면 네 사람이 펌프질을 해서 불을 꺼야 했죠. 아버지는 면의 의용소방대 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보면서 소방직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과묵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자신의 삶을 들려주시지 않았지요. 저는 3남3녀 중 막내였는데, 그래서인지 어릴 때는 철이 좀 없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있던 훈장으로 엿을 바꿔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6·25 무공훈장이었어요. 아버지가 참전용사였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전씨는 아버지가 꾸준히 나갔던 봉사 모임 ‘초롱계’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동네의 독거노인들을 돌보셨습니다. 돌보던 독거노인이 돌아가시면 가족처럼 장례를 지냈습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전씨가 소방관의 직업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처음 소방관이 됐을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부조한 것은 잊고, 부조받은 것만 기억했다가 보은하라고 하셨어요.”

전씨는 최근 다문화가정 청소년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수십 년간의 긴급출동 경험을 통해 다문화가정의 청소년들이 일반 가정에 비해 어렵게 생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려고 3년 전부터 한국복지사이버대학 다문화보육복지학과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2016년에 졸업하면 아동센터에서 봉사 실습도 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을 직접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문화적 차이가 크게 나더군요. 대화를 통해 이들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헌혈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혈액형은 한국에서 가장 흔하다고 알려진 RH+ A형. 그는 1986년에 소방관이 된 후에 본격적인 헌혈을 시작했다. “긴급구조 활동을 하러 현장을 다니다 보면 헌혈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지 피부로 실감하게 됩니다. 혈액은 수술뿐 아니라 암환자와 백혈병 환자의 치료에도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백혈병 전문병원에도 혈소판 혈액이 항상 모자란 지경입니다.” 그래서 전씨는 일반 헌혈 외에도 성분 헌혈을 하고 있다. 성분 헌혈은 항암치료에 필요한 혈장 성분과 백혈병 환자 수혈에 필요한 혈소판을 분리해 헌혈하는 것이다. 혈액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일반 헌혈보다 시간이 1시간 정도 오래 걸린다. 혈액의 철분 수치도 높아야 한다. “헌혈을 하려다 보니 저절로 몸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 전씨의 말이다.

처음 전상기 소방관은 “내가 영웅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다”라며 인터뷰하기를 망설였다. “제 주변에는 더 훌륭한 분이 많습니다. 남 모르게 이웃을 돕는 분도 많고요. 저는 이웃에게 아주 작은 도움을 준 평범한 사람입니다.” 전씨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아들 둘을 뒷바라지하며 많지 않은 소방관 월급으로 봉사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제가 바라는 일은 아들들이 저의 모습을 알아봐주는 것입니다. 제 아버지가 그랬듯 저도 아들들에게 남을 돕는 것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각자의 생활 속에서 이웃을 돕는 일에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더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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