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간 제자 4000명 길러낸 박영도 수원제일평생학교장

박영도 수원제일평생학교장은 학교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60·70대 제자들에게 하트 세례를 받았다. “어머님들이 야학에 오시면 꼭 여중생, 여고생처럼 설레나 봐요. 잃어버린 소녀시대를 되찾으신 것 같아요. 저도 33년 동안 야학을 했지만 여고 교생실습 나온 총각 교사처럼 떨릴 때가 있습니다.” /이태경 기자

박영도(58) 수원제일평생학교장은 1983년부터 야학(夜學) 교사로 일했다. 제자만 4000명이 넘는다. 이 학교에선 10대 청소년부터 60·70대 노인, 외국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다문화 가정 새댁까지 무료로 가르친다. 그는 현재 전국야학협의회장과 한국문해(文解)교육협회 이사, 한국평생교육사협회 이사를 겸하고 있다. 2010년 교육과학부 장관상에 이어 지난 12일에는 교보교육대상을 받았다. 그런 박 교장이 "내 소원은 야학이 문을 닫는 것"이라고 했다.

―왜 야학이 사라져야 하나요.

"우리 학생들을 이제 정부가 책임져야 하니까요. 지금 야학에 다니는 분들은 대부분 60·70대 할머니예요. 평생학습을 강조하지만 국가에서 야학에 다니는 학생 한 명한테 쓰는 돈이 1년 8만원도 안 됩니다. 초등학생·중학생한테는 600만원, 고등학생은 800만원을 지원하면서요."

―지금도 야학은 사라지고 있는데요.

"야학이 꽃이었던 1980년대에 서울에만 250개, 전국에 3000개 정도 있었지요. 현재 전국에 250개 정도 남았어요. 활발히 활동하는 건 60~70개 정도입니다. 이들 기관도 국가 지원이 미미해서 존립이 힘들지요. 대신 복지관이나 종교 단체 부설 교육기관, 평생교육기관도 많이 생겼지만 한글부터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기관은 드문 것 같아요."

―야학이 없어지면 무슨 일을 하시려고요.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도 지하철 역에 노숙자가 있잖아요. 좋은 교육제도가 생겨도 국가에서 챙겨주지 못하는, 구석진 곳에 있는 사람들이 생길 거예요. 그분들을 위해 제가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박 교장을 지난 25일 수원제일평생학교에서 만났다. 이 학교는 지하철 수원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지만 숨바꼭질하듯 꼬불꼬불 골목에 숨어 있었다. 차에서 내려 찾는 데 10여분이 걸렸다. 학교는 지은 지 수십년 돼 보이는 팔달구민생활체육센터 3층에 세 들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다. 약 330㎡(100평) 공간에 자원봉사 교사 40여명, 학생 250여명이 모여 배우고 가르친다. 박 교장은 "찾는 데 힘드셨지요? 여기서 공부하는 건 더 힘든 일이지요" 했다.

"10년만 가르치겠다"고 했는데 33년

그는 1958년 경북 구미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가난한 농부였다. "초등학교에 가려면 매일 15리(6㎞) 길을 걸어 다녀야 했지만 공부가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는 의대생을 꿈꿨지만 영남대 식품가공학과에 입학했다. "재수하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그대로 다녔다"고 했다. "원하는 공부를 못하니까 방황했어요. 군대에 갔다가 1983년 복학했는데 그때 도서관 게시판에서 야학 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어요. 대구 효목성실고등공민학교였어요. 학교를 못 다니는 10대 아이들이 중졸 검정고시를 치도록 돕는 학교였지요."

―왜 야학 교사가 됐나요.

"모르겠어요. 그 당시만 해도 야학은 대학 문화 중 하나였어요. 낭만 같은 측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야학은 노동운동 측면이 강했지요.

"저는 검정고시 준비하는 것만 도왔어요. 학생들과 함께 김민기씨의 상록수 같은 노래를 부른 적은 있지만 마르크스나 레닌 책을 학생들과 함께 읽지는 않았어요. 아이들이 공부를 하면 관점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게 되잖아요. 스스로 깨치게 하는 게 사회운동이라고 봤어요."

그는 1988년 서울 구로공단에 있던 제약회사에 취직한 뒤 종로 YMCA 청소년 학교에서 활동했다. "직장을 갖게 되고 야학을 그만둬야 하나 싶었는데, 사무실 옆자리 여직원이 이러는 거예요. '야학 교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결혼하면서 그만두게 됐다. (야학 교사에) 관심 있냐'고요. 그 다음날부터 YMCA 청소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13, 14살 먹은 아이들이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도 밤에 공부하고 싶다면서 야학에 찾아왔어요. 그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사그라들까 봐 두려웠지요. 빠질 수가 없었어요."

―부인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

"1988년 3월 제주도 신혼여행을 다녀온 날 신접살림을 차린 화곡동 전세 단칸방에 아내를 두고는 수업하러 갔어요. 아내가 아직도 두고두고 그 얘기를 합니다. 그때 아내가 임신해서 홑몸이 아니었거든요. 아내가 그만두라고 할 때마다 딱 10년만 채우고 그만두겠다고 설득했어요. 10년이 됐을 때는 이왕 했으니 10년 더 채워서 20년만 하고 다시는 안 하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왔네요."

신혼여행 다녀온 날에도 야학 교단에

그는 1991년 경기도 오산에 있는 다른 제약 회사로 직장을 옮기고 수원으로 이사했다. 그 후에도 수원과 종로를 오가며 야학 교사를 계속했지만 1년 만에 그만둬야만 했다. "직급이 올라가면서 시간을 내기 어려워지더군요. 당시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아서 수원에서 종로까지 가는데 두 시간 정도 걸렸어요."

―그래도 몇 개월 뒤 다시 야학을 시작했죠.

"퇴근길 수원역 전봇대에서 수원제일야간학교(현 수원제일평생학교) 교사 모집 공고를 봤어요. 손바닥만 한 모집 광고였는데 한눈에 들어왔어요. 아, 이게 내 숙명인가보다 싶더군요."

―이 학교는 1963년 세워졌지요.

"네. 근처에 공군 10전투비행단 장병들과 서울대 농대생들이 지은 학교죠. 1층짜리 약 30평(99㎡) 무허가 가건물이었어요. 군데군데 깨진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별이 보이고 그랬어요."

이 야학 건물은 1996년 9월 5일 불이 나 전소됐다. "그날을 잊을 수 없어요. 불이 난 이튿날 아침에 소식 듣고 부랴부랴 가봤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타다 만 출석부만 보이더군요. 남은 물품을 정리했는데 라면 한 상자 분량밖에 안 나왔어요. 당시 소방서에서도 화재 원인을 모른대요. 그곳에 다시 건물을 짓겠다고 하니까 구청에서 허가를 안 내줬어요."

야학 전·현직 교사와 재학생, 졸업생이 500만원을 모았고 이 돈을 보증금으로 수원 평동의 한 개척 교회 2층을 빌렸다. 박 교장은 "내가 똑바로 서면 머리와 천장 사이가 한 뼘밖에 안 됐다"고 했다. 그는 자비를 들여 칸막이 공사를 하고 교실을 꾸몄다. 이때부터 이 학교 교장이 됐다.

―어떻게 교장이 됐나요.

"원래 계시던 교장선생님께서 병환으로 이제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야학은 교장이 운영비를 거의 다 내는 경우가 많아요. 교장 떠나고 운영비를 마련 못하니 우왕좌왕했어요. 교사는 원래 10명 정도 됐는데, 다 떠나고 저 포함해 4명만 남았어요. 야학을 접자는 얘기가 나왔고, 제가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고 했어요. 교사도 학생도 다시 모았죠."

―학생들이 다시 모이던가요.

"의무교육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늘어나니까 야학에 오는 10대 아이들이 없어졌어요. 대신 글을 못 배운 40대, 50대 가정주부들이 몰리기 시작했어요."

―2011년 이곳으로 올 때 경기도지사를 만나서 담판을 벌였다고요.

"학생이 100명을 넘어서니까 20평(66㎡) 공간에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더라고요. 지금 이 건물은 원래 체육 복지 시설로 등록이 돼서 야학을 못할 뻔했는데 제가 가진 인맥을 총동원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문제는 인테리어 비용이었어요. 당시 김문수 경기도지사 시절이었는데 무작정 도지사실로 찾아가서 면담을 요청했어요. 안 된다고 하는 비서들과 실랑이를 벌이는데 마침 김 지사와 마주쳐서 잠깐 말씀을 드렸어요. 3개월 후 5000만원이 지원되더라고요."

―그 돈으로 충분했나요.

"전혀요. 우리 어머님들 나이가 많으시니까 여름에는 시원해야 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야 하니 돈이 더 들 수밖에요." '수천만 원 더 들었다고 하던데요' 물으니 박 교장은 "아무튼 공사는 잘 끝났다"고 했다.

박영도 교장이 1989년 서울 YMCA 청소년학교 시절 학생들과 소풍을 간 모습. 앞줄 오른쪽에 앉아 있는 남성이 박 교장이다(왼쪽 사진). 2010년 수원제일평생학교 졸업식에서 박 교장이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다. /박영도 제공

가르치면서 배운다

약 10㎡(3평)쯤 되는 교장실 벽 액자에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다'는 뜻이다. 그는 "30년 넘게 야학을 하면서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게 더 많다"고 했다.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자 그는 복도로 나가자고 했다. 60·70대 할머니·할아버지가 쓴 시가 전시돼 있었다. 박 교장은 그중에서 시 하나를 골라 읽었다. "날마다 책가방 메고/ 학교에 간다/ 주위 사람들이 이 나이에/ 배워서 뭐하느냐 비웃어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간다/ 평생에 못 배운 한/ 나는 하늘나라에 가서 선생님 해보련다."

박 교장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 중 하나"라고 말했다. "여기에 인생이 담겼어요. 저는 인생을 배우고 있습니다. 야학에 나오는 분들은 대부분 할머니이고 아직도 일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새벽부터 일 나가서 사무실, 계단, 화장실 청소하고 오후 3~4시쯤 퇴근하고 이곳으로 오시죠. 통학하는 데 두 시간 넘게 걸리는 분들도 있어요. 기역, 니은, 디귿부터 시작해서 A, B, C까지 익혀서 중학교·고등학교 검정고시 치르고 대학까지 졸업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분들을 보면서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제자가 기억에 남나요.

"젊었을 때 가르친 야학 제자 중에는 의사, 한의사, 교수가 된 사람들도 있지요. 일흔 넘은 할머니께서 대학을 졸업하는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가르치는 모든 제자가 소중합니다. 저분들 이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려고 합니다. 야학 오시는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문상 가는 경우가 1년에 10여차례 돼요. 어제 수업 들으러 나오셨는데 오늘 안 나오셔서 전화해 보면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다'고 해요. 삶을 마감하면서, 생을 정리하는 그 순간에도 배운다는 게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배움의 한(恨)이 깊은 분일수록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배우는 데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공부를 하면요, 자신감이 생기니까 표정부터 밝아져요. 우선 학교에 나오는 것 자체가 운동이 돼요. 노인이라고 집에만 있어봐요. 자꾸 아프고 자식들한테 실망한 것만 떠오르죠. 자식들이 부모한테 스마트폰을 선물하는데요, 글자를 못 읽는데 이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렇다고 아들 딸이 시간 내서 부모한테 글을 가르쳐 드리진 않잖아요. 졸업식 때 자식들이 와서는 부모가 쓴 글을 처음 보고 모두 펑펑 웁니다."

그는 1999년 제약 회사를 나와 기능성 쌀을 개발·판매하는 벤처 회사를 차렸다. 박 교장은 "출퇴근이 자유로워져서 야학에 좀 더 신경을 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벤처 회사에서 번 돈 일부는 야학 건물 임대료, 전기세·수도세 등 공과금, 일부 강사 지원비 등으로 쓰인다. 그의 컴퓨터 화면 옆에는 '임대료 390만원 납부 가능할까요'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직원 누군가 그가 없을 때 붙여놓은 것 같았다. 그는 "임대료가 밀려서 지금 돈을 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교보교육대상 상금이 3000만원이라고 하던데요.

"빌린 돈 갚고 다른 비영리단체에 조금씩 보내느라 이미 다 썼어요."

―야학하느라 수억원을 썼다고 하더군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30년 넘게 야학을 하다 보면 잃는 것도 있겠지요.

"아무래도 친구들 못 만나고 가족에게 신경 덜 쓰게 되죠. 물질적인 면에서 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얻는 게 더 커요. 처음 벤처 회사 차리고 잘 나갈 때가 있었어요. 1년 매출이 20억원이 넘었어요. 그때 같이 좋은 데 가서 술 마시자, 놀러다니자 유혹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야학이 저를 붙잡아 줬어요. 2003년에 감사원 감사를 받았어요. 허가 안 받고 제품을 팔았다면서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저를 고발한 거예요. 그때 농림부에서 기능성 쌀을 농산물로 유통해도 된다는 유권해석을 받았는데도 그랬어요. 재판하는 도중에 거래가 거의 다 끊겼고 저희 회사 직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때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야학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어요. 재판에서 이길 때까지 수개월간 견뎌낸 건 야학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는 회사 지분만 유지한 채 경영은 다른 사람에게 넘긴 상태다.

전 과목 가르치는 '천재 선생님'

일주일 전 그의 아내는 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다음 달 수술대에 오른다. 박 교장은 "초기에 발견됐고 전이가 안 됐지만 당황스럽다"는 얘기를 담담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사실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아내가 상심이 크시겠어요.

"충격을 많이 받았나 봐요."

―야학은 며칠 쉬었겠군요.

"아내 검사 결과 확인하고 입원했던 날 하루 쉬었어요. 보호자 동의도 필요하고 아내도 불안해해서요. 이튿날 출근했습니다."

―좀 쉬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원래 중학교 과학을 가르쳤는데 2개월 전부터 정규 수업에는 안 들어가고 있어요. 하지만 특별한 일 없으면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수업 끝나는 오후 9시반에 퇴근해요. 혹시 교사들이 못 오게 되면 제가 대신 수업에 들어가야 하거든요.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어느 과목이든 다 가르칩니다. 학생들이 저보고 천재라고 하지만 30년 이상 가르치면 이렇게 돼요. 특히 미술과 음악은 자신 있어요. 담당 교사가 부족하다 보니 수업을 많이 했거든요. 제가 인기가 많아요. 수준에 맞게, 눈높이 교육을 잘해요. 이래 봬도 학생보다 나이가 어린 영계 선생님입니다. 제가 아재 개그 한 번 하면 자지러집니다." 내내 진지했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건물 계단을 내려갈 때 70대 할머니 한 분이 손자가 멜 법한 가방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소년을 만나러 가는 소녀처럼 얼굴이 발그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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