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차바' 때 광안리 해변 청소한 미국인 디애나 루퍼트

"가끔 제가 '이쪽 골목 식당은 화덕 피자를 꽤 잘하고, 저 약국은 항상 늦게까지 문을 열고, 요 아래 마트에선 싱싱한 과일을 팔더라'고 말하면 다들 화들짝 놀라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면서요.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죠. '응? 나 부산 살잖아(웃음)!'"

디애나 루퍼트(Rupert·38)씨는 스스로를 '부산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나고 자랐고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와 날카로운 콧날이 몹시 이국적이지만, 그는 "부산은 둘째 딸이 태어난 곳이자 우리 가족이 사는 곳이다. 우리에겐 부산이 곧 우리 집"이라고 했다.

지난 10월 초 루퍼트씨와 그의 두 딸 피오나(11)와 스텔라(5)는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태풍 '차바'가 휘몰아치면서 쓰레기장으로 변해버린 광안리 해변을 이들 세 모녀가 청소한 게 시작이었다. 엉망이 돼버린 해변을 보고 딸들이 먼저 "우리가 치우자"고 했고, 루퍼트씨와 아이들은 장화와 고무장갑, 청소용 갈퀴, 소꿉놀이용 삽과 바구니를 챙겨 해변에 나왔다. 그렇게 꼬박 4시간을 청소했다. 그들이 백사장을 치우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도 모여들어 함께 청소했다. 이들이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은 SNS로 퍼져나갔고, 신문과 TV로도 보도됐다. 부산 수영구청은 10월 중순 이들 세 모녀에게 '자랑스러운 외국인 주민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루퍼트씨를 지난 4일 부산 민락동 집에서 만났다. 말끔하게 치워진 아파트엔 두 딸의 사진과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아이들은 친구 집에 놀러 나가고 없었다. 거실에선 그가 직접 구웠다는 바나나 케이크 냄새가 났다. 루퍼트씨는 "부산 사람 집에 잘 왔다"며 웃어 보였다.

지난 10월 태풍 ‘차바’로 엉망이 된 광안리 해변을 청소하던 디애나 루퍼트와 두 딸의 모습. / 조선일보 DB

내겐 너무 따뜻한 부산

―뉴스에 나고 상까지 받았는데.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딸들과 서울에도 가고 홍콩도 다녀오느라 수영구청에서 주신 상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받아보지도 못했다. 어리둥절하기도 한데, 정작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한다. '세상에, 엄마! 우리가 뉴스에 나왔어!' 하면서(웃음)."

―알아보는 사람도 많은가.

"식당이나 마트, 약국에 가면 많이들 말을 걸어온다. '광안리에서 청소하던 그분들이죠? 반가워요!' 하면서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악수를 청하기도 한다. 다들 따뜻하게 대해주니 기분 좋다."

―외국인이라서 받는 이런 관심과 환대가 어색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부산 출신이 아니라서 아무래도 더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느낄 순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사람들이 보여주는 호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들 우리를 이웃으로 느끼는 게 아닐까(웃음)?"

루퍼트씨는 2009년 8월 미국인 남편, 큰딸과 함께 부산에 왔다. 미국 미네소타에 있는 월든대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땄고, 졸업 후 예멘에서 국제학교 교사를 하다가 테러 위협이 심해지자 1년 반 만에 부산으로 옮겨왔다. 부산 백병원에서 둘째 딸 스텔라를 낳았다. 현재는 부산국제외국인학교 초등학생반 교사다. 루퍼트씨는 "부산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왔지만 도시가 무척 깨끗하고 안전한 데다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눈부신 자연환경까지 갖추고 있어 금세 반해버렸다"고 했다.

―부산에서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어떤가.

"일단 미국보다 의료 혜택이 훌륭하다. 부산엔 영어가 유창한 의사 분들이 제법 있어서 언어 때문에 고생할 일도 많지 않다. 아이들 만나면 친절하게 일상생활 상담도 해주고, 미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를 설명해주는 의사 선생님도 계신다. 한국의 교육 환경이 혹독하다는 얘기는 건너 건너 듣긴 했는데 직접 체험해본 적은 없어서 잘은 모른다."

―부산 사람 특유의 정(情)을 느낄 때도 있었는지.

"둘째가 아직 어릴 때 아이를 안고 큰아이와 함께 장 보러 다닌 적이 있었다. 배는 몹시 고프고 그날따라 몸은 너무 안 좋고 품에 안긴 아이는 울고…. 그 상태로 마트에 있는 푸드 코트에 서서 밥을 겨우 떠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부부가 "우리가 아기를 잠시 안고 있을 테니 편히 먹으라"고 했다. 정말 고마웠다."

―불편할 때는 없었나.

"글쎄? 둘째 아이 치마가 뒤집어졌다고 아주머니가 계속 따라오면서 '애기!' 외치더니 묻지도 않고 아이 엉덩이를 툭툭 칠 때, 아기 낳고 나서 7월 한창 더운 날 에어컨 틀고 앉아 있었더니 '이러면 몸에 바람 들어서 안 된다'고 이웃이 찾아와서 말릴 때(웃음)…. 그럴 땐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안다. 다들 마음이 따뜻해서 그렇다는 걸."

떠나고 만나고 사랑하고

루퍼트씨는 교육학 학위를 따기 전 미국에서 식당 매니저 일을 했다고 했다. 잠깐 광고 모델을 한 적도 있었다. 결혼을 한 뒤 위스콘신주에서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로 이주했다. 샌디에이고는 살기 좋은 도시였지만 그만큼 기초 생활 비용이 높았고, 이 때문에 여행할 돈이 늘 부족해서 고민이었다고 했다. 루퍼트씨가 예멘 국제학교 교사로 떠났던 것도 예멘으로 옮기면 좀 더 여행을 많이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했다.

―여행에 큰 가치를 두는 것 같다.

"꽤 종교적이고 엄숙한 집에서 자랐다. '이건 해도 된다' '이건 하면 안 된다' 같은 규율과 제약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답답했다.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독립했고, 이때부터 스스로 뭐든 겪어내고 체험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해왔다. 인터넷 검색으로 뭐든 알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서 더 직접 가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발로 밟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산에 오르고, 바다에 가고, 강을 건너고…. 그런 순간들이 없다면 사는 재미가 있을까?"

―어디 어디를 다녀봤나.

"미국에 있을 땐 남미를 많이 다녔다. 코스타리카, 브라질 같은 곳…. 배낭을 메고 걷고 잠은 주로 호스텔에서 잤다. 예멘으로 가서도 초반엔 치안이 괜찮은 편이어서 가족들과 여행을 자주 다녔다. 인근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같은 곳도 드나들었고. 부산에 와보니 중국·일본·동남아를 오가기에도, 한국 구석구석을 여행하기에도 이만한 도시가 없더라. 자주 차를 몰고 다니거나 기차를 타고 곳곳을 놀러다닌다. 제주도와 남해, 속초와 강릉, 전주엔 정말 여러 번 가봤다. 남해 다랑이논도 멋지고, 속초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도 즐거웠고, 전주비빔밥도 맛있고…!"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면.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는 걸 참 좋아한다. 설악산과 한라산에도 갔다. 산에 갈 때마다 한국 사람들 옷차림을 보고 놀란다. 다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웃도어 전문용품으로 무장하고 손에 등산 스틱을 쥐고 오르는 광경을 매번 보는데,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웃음).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든다. 이곳에선 나도 겉치레에 신경을 거의 안 쓰지만, 정작 위스콘신에 돌아가 친구들 만날 때면 내 옷차림을 돌아보게 된다. 사람 마음이 원래 그렇다. 진짜 친한 사람들 앞에서 원래 더 신경 쓰는 법이다. 어쩌면 그들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웃음)?"

―여행을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게 있다면.

"뭐든지 스스로 해보라는 것.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면 버릇이 나빠지기 쉽다. 진짜 일상을 잊고 여행의 환상을 현실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럴수록 모든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있도록 가르친다. 청소하고 옷 입고 설거지하고 밥 챙겨 먹고 숙제하는 모든 것을 아이들 스스로 하도록 가르친다. 광안리 해변에서 아이들이 내게 '청소하자'고 했던 것도 그래서였을지 모른다. 이 아이들에겐 그게 일상이고 당연한 것이었을 테니까."

“어? 그새 깨끗해졌네?” 루퍼트씨가 광안리 바닷가를 바라보며 농담했다. 그는 “이곳이 아이들과 함께 뛰노는 우리 동네, 우리가 사는 곳이라서 치웠을 뿐”이라고 했다. / 김종호 기자

지금 우리가 행복한 이유

큰딸 피오나는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한다. 노래와 춤, 연기에 재능이 있는 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말을 배우는 것도 좋아해서 한글을 제법 읽고 쓴다. 언젠가 루퍼트씨가 집에 왔더니 피오나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한국 아이들이 수다를 떨다가 같이 어울리고 싶어 하는 피오나에게 '너는 이런 말까지는 이해 못 할 거야'라고 해서 속상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 스텔라는 아직 천진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다섯 살이다.

―아이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뭘까.

"책임감. 이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남과 함께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애쓴다. '온전히 제 몫을 하는 사람(fully functioning man)'이 되는 것.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렇게 자립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이 유일한 목표다. 그 외에 더 바랄 것이 있을 것 같진 않다."

―부산을 떠난다면 어디로 가게 될까.

"일단은 이곳에서 충분히 더 즐기고 싶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두 딸을 키우는 일이 만족스러우니까. 피오나도 미국보다 부산을 편하게 여긴다. 1년에 두 번씩 친정에 가는데, 거기 갈 때마다 부산 집에 가고 싶다고 운다(웃음). 아이들에겐 여기가 고향인 거다."

―두 딸에게 해주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글쎄…." 루퍼트는 갈색 눈을 잠시 감았다 뜨더니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일을 해봐. 두려워하지 말고(Do good. Without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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