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안명초 20회 동기생

인생은 참으로 아련하다. 눈에 박힐 듯한 선명한 기억도 바닷가 모래 위 발자국이 파도에 씻겨나가듯 일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는 살아온 인생의 몇%를 기억하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모래알보다 작은 기억의 편린을 부둥켜안고 그걸 인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풀꽃도, 우정도, 이웃도 알고 보면 모두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대목이 마음에 와 닿는다.

1963년.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하천이 흐르는, 대부분 흙길이고 전기도 없었던 산간벽지 두메산골에 조그만 국민학교(현 초등학교)가 있었다. 코흘리개였던 우리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난생처음 학교라는 곳에 입학했다. 당시 여름이면 우리는 함께 어울려 도랑에서 붕어와 가재, 미꾸라지를 잡고 뒷동산에 올라선 매미와 잠자리를 잡곤 했다. 그러곤 목청껏 동요를 부르며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꿈을 키웠다.

배고픈 보릿고개를 넘으며 살아온 여느 세대처럼 어느새 세월이 흘러 주름살이 늘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나이가 됐다. 사람마다 고향이 있듯 어린 시절 꿈을 먹고 자란 모교가 마음속에 간직돼 있다. 긴 칼을 옆에 차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무고하신지. 기름걸레로 반질반질 닦아 놓은 복도는 아직도 윤기를 잃지 않고 있는지. 어린 시절 그늘이 됐던 교정 한쪽의 나무는 여전히 또래들의 눈높이만큼 자라 있는지.

50여 년 세월의 간극.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0여 년이 지나서야 동기들과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정기 모임을 갖고 있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동기들이 기꺼이 달려와 동참해 화기애애하게 술잔과 찻잔을 앞에 두고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젊음과 열정으로 빚어냈던 추억들을 되새기곤 했다. 하지만 부와 명예, 권력과 자식 자랑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우정과 건강을, 또는 불우이웃을 위한 봉사에 대해서만 마음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상록수처럼 변함없이 10년째 금요일마다 복지시설에서 미용봉사와 목욕 도우미를 한주도 거르지 않고 동참해오고 있다. 특히 손자 같은 후배들을 위해 매달 십시일반으로 모교 장학금과 발전기금 모금에 적극 참여하는 동기들의 그 열정은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학위는 박사다. 그런데 요즘 박사보다 더 높은 학위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밥사’라고 한다.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사는 사람을 말한다. 밥사보다 더 높은 학위는 ‘감사’라고 한다. 이 세상을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감사보다 더 높은 학위는 ‘봉사’라고 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주변의 불행한 사람을 위해 기부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박사보다 훨씬 더 존경받는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김해 안명초 제20회 벗님들을 ‘이 시대의 천사, 봉사 중독자’라고 감히 부르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