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한 형님, 강임순 형수님

언젠가부터 우리 남매들은 부모님 합동 기일에만 맏이인 형님 집으로 모인다. 명절 때면 형님 집에는 며느리와 사위가 오고, 우리 7남매 가정도 자녀들의 아지트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추석은 물론 4월 부모님 기일 때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못 모였으니 올해 남매들 대면은 힘들 것 같다.

나보다 두 살 위인 형님은 73세, 아직 활동할 나이지만 지금은 몸이 불편하다. 2013년 6월, 형님 나이 66세 때다. 아침에 일어나 면도하는데 손에 힘이 없고 말도 어눌하더란다. 병명은 ‘길랭·바레증후군’. 말은 그런대로 하지만 온몸이 마비돼 옴짝달싹 못 하는 희소병이다.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세포-매개 면역반응과 바이러스 영향이 크다고 한다. 우리는 형님이 월남전에서 마신 독성 화학약품인 고엽제의 후유증과 피로가 겹친 데 따른 면역력 약화를 의심할 뿐이다.

다행히 의식 수준이나 뇌 작용에는 문제가 없지만 사지 마비와 감각 이상, 호흡곤란, 근 쇠약 등으로 형님 혼자서 할 수 있는 영역이 거의 없다. 그러니 종일 간병하는 형수님의 고생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희망은 오로지 “불치병이 아니고 시일이 걸려서 그렇지 차츰 좋아진다”는 주치의의 장담이다. 특정 병원 한곳에 오래 입원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이 병원 저 병원 재활 병동을 찾아 병원을 자주 옮겼다.

동생들은 잠시 들르는 문병이지만,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고 교대할 사람도 없는 형수님은 환자와 다름없다. 작은 체구로 코끝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형수님의 간병 모습에 차라리 환자가 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긴 간병에도 지친 기색 없이 항시 잔잔하게 웃는 형수님의 애틋한 지성으로 형님은 드디어 퇴원했다. 지팡이에 의지했지만, 당당히 걸어서 말이다.

한참 만에 집으로 돌아온 형님은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낯설다고 하면서도 불편한 손가락에 볼펜을 묶어 일기를 쓰고, 이전처럼 가계부도 적기 시작했다. 땀범벅이 되도록 근육 훈련과 물속에서 걷기를 반복하는 재활훈련에 하루해가 금세 저문다. 어느 날인가는 작심하고 가까운 딸네 집에 한 시간을 걸어서 갔다고 한다. 형님과 함께 고향에 가면 지금도 동네 어른들은 형님을 ‘오토바이’로 부른다. 학교 다닐 때 워낙 달리기를 잘해 얻은 별명이다. 그러던 형님이, 빨리 걷기도 어려우니 달리기는 엄두가 나질 않는다.

형님과 형수님 두 분이 하도 금실이 좋아 재활 병동 이웃들은 ‘저 두 사람이 무슨 부부, 딱 그렇고 그런 사이구먼’이라고 수군대기도 했단다. 형님은 긴 투병생활이 지겹기도 하련만 ‘그리운 고향 친구들을 예사롭게 만나고 좋아하는 트로트 콘서트에 가는 날을 고대하며’ 오늘도 재활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는다. 형수님은 일부러 틈을 만들어 딸네 집으로 달려간다. 손주들을 보면서 기운을 차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이지만 조금씩 밝은 빛이 보인다는 두 분의 말씀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올곧고 가지런하게 살아온 형님, 형수님이다. 동생들 모두가 숙연해지는 추석 뒤끝이다.

바로 아래 동생 노청한 드림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