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손대선 기자 = 지난 25일 밤 신림역 1번 출구 앞에서 차려진 거리 청소년 상담소에서 가출 청소년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 2016.05.25. sds1105@newsis.com

가출 5일째. 게임하지 말라는 부모 잔소리가 싫어 나왔다. 잠은 친구 집에서 잔다. 부모는 걱정 안 한다. 전화도 없다. 친구 아버지가 아침에 콩밥을 해놓고 가는데 이젠 질려서 못 먹는다. 수중에 가진 돈은 순대 가게서 시급 6000원짜리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뛰어 번 1만5000원이 전부. 하루 한 갑을 피는데 담뱃값이 너머 비싸다. 술은 그럭저럭. 그래도 학교는 간다. 밥을 먹어야 하니까.

지난 25일 오후 9시께 여성가족부가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역 1번 출입구 앞에 차려놓은 '찾아가는 위기청소년 거리상담소'에서 만난 고등학교 1학년 진모(17)양과의 대화를 요약하니 이렇다.

진양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자칭 '소울 메이트' 동갑내기 정모양과 서울시 금천청소년쉼터 직원들이 나눠주는 과자를 쉴새 없이 입에 넣었다. 아이들은 가출 원인과 현재 희망 등의 질문이 담긴 설문지를 재빠르게 채워나갔다. 직원들이 1회용 로션 한세트와 볼펜, 인권수첩을 건넸다.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고춧가루가 군데군데 묻은 흰색 교복 상의에 가출 청소년들의 '표준 항목'이라는 삼선(三線) 슬리퍼를 신은 진양은 수차례 가출을 한 모양이었다. 신림역 밤거리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일명 '바가지머리'에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 탓에 남자아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기자는 '가출 5일차'의 이 여자아이가 겪었을 풍파를 알지 못했다.

신림역 주변은 하루 14만명의 유동인구가 오가는 서울 서남부 최대 상권중 하나다. 동시에 진양처럼 가출청소년들이 가장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어림잡아 하루 수백명의 가출 청소년이 이 거리를 누빈다.

아이들은 왜 신림역으로 몰려들까. 금천청소년쉼터 최은영 팀장에 따르면 신림역 일대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고 아르바이트 일자리가 도처에 널렸다. 여기에 적은 돈에 여흥까지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가출한 청소년들이 싼 가격에 묵을 수 있는 원룸이나 고시원이 밀집해 있다. 신림동 고시촌의 시대가 저물면서 대학생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가출 청소년들이 대신했다. 가출팸(가출한 청소년들이 모여서 원룸이나 모텔 등을 빌려 가족처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집주인들의 묵인하에 공공연하게 자리 잡았다.

물가는 강남이나 신촌, 홍대 등지에 비해 싸다. 반경 1km 안에 24시간 문을 여는 PC방, 찜질방이 지천이다. 500원이면 최신노래 한곡을 부를 수 있는 코인노래방도 성업중이다. '모든 안주 3900원'이란 술집 간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인근 신림 순대타운은 불판 닦기 등 아르바이트를 수시로 구한다.

여기에 인근 도림천은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담배를 피우고 술 마시고 떠들 수 있는 곳이다.

올해로 17년째 가출 청소년 상담을 하고 있다는 금천청소년쉼터 최은영 팀장은 가출 청소년들에게는 '노련한 누나, 언니'였다. 망아지처럼 예측불허인 아이들도 최 팀장과 상담할 때만은 구김살 없는 10대의 모습을 보였다.

【서울=뉴시스】손대선 기자 = 청소년 아웃리치 도중 찾은 코인 노래방. 2016.05.29. sds1105@newsis.com

아이들이 자신들의 비행을 가감없이 털어놓을 때 최 팀장의 낯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최 팀장은 신림역 일대에서 계도한 아이들의 상당수를 금천청소년쉼터로 데려갔다. 금천구 가산디지털1로 118에 자리 잡은 쉼터는 3개월 미만의 단기쉼터와 그 이상의 중·장기쉼터로 구분돼 운영된다. 단기쉼터에는 20명, 중·장기쉼터에는 7명이 머물고 있다. 머무는 청소년들의 나이는 9세부터 24세까지 다양하다. 금천청소년쉼터는 365일, 24시간 아이들을 받아들인다. 초기에는 단순히 거처를 제공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학교복귀를 위한 체계적인 학습프로그램과 취업지원 프로그램까지 갖췄다.

오후 10시30분께 거리상담소를 찾는 아이들이 뜸해지자 금천청소년쉼터 직원 6명이 '아웃리치(outreach)'에 나섰다.

"찾아오지 않으면 찾아가아죠" 최 팀장은 말했다. 가출 청소년의 쉼터 이용률은 30% 안팎에 머물고 있다. 이 때문에 나머지를 찾자면 거리의 아이들을 찾아가는 아웃리치는 필수다.

연두색 조끼를 걸친 쉼터 상담사들이 인근 도림천을 중심으로 늘어선 코인노래방, 주점 등을 무작위로 들러 10대들이 있는지를 파악했다. 경찰 불시검문처럼 하지만 사법권이 없다보니 업주들과 마찰도 적지 않다.

취객들의 시비도 빈발한다. 아웃리치 도중 "왜 도로를 막고 다니냐"며 50대 남자가 계속 시비를 붙였다.

상담사들은 그때마다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삼선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앳된 아이들은 십중팔구 가출 청소년이었다. 상담사들은 이들에게 먹을거리를 나눠주면서 쉼터 안내팸플릿을 나눠줬다.

도림천변에 모여앉아 상담사과 대화를 나누는 10대 남자아이들의 목소리에는 취기가 스며있었다.

주변상인들에게 가출 청소년이 주 수입원이지만 동시에 골칫거리였다.

자정 무렵, 신림역 1번 출구 바로 앞 커피숍 셔터 문을 내리던 한 점원은 "아이들이 새벽에 몰려와서 소파에 드러눕고 자기도 한다"며 "침도 아무렇지 않게 뱉고 영업방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커피숍 바로 뒤 후미진 주차장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담배꽁초가 널려 있었다. 소변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울=뉴시스】손대선 기자 = 도림천에서 금천청소년쉼터 상담사들이 위기 청소년을 발굴해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2016.05.25. sds1105@newsis.com

인근 패스트푸드점은 술 취한 가출 청소년 때문에 몸살을 앓다 최근 들어 오전 2~5시까지는 아예 문을 닫는다고 한다.

아웃리치를 마칠 즈음, 거리상담소 인근 도로에 승합차가 급정거했다. 여성 3명이 내렸다. 유흥주점이 밀집한 거리로 뛰어갔다. 그들이 지나칠 때 향수냄새가 진동했다. 짙은 화장으로 가렸지만 얼굴은 좀전에 본 진양과 2~3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저 아이들은 과연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거리의 아이들에게 간섭이 개입되는 순간,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어긋나려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 때문에 상담사는 '간섭 대신 질문'을 한다. 이들의 화장품, 패션, 먹을거리, 게임, 이성관계에 대해 끈질기게 묻는다. 그것은 관심의 또다른 이름이다.

최은영 팀장은 이날 아웃리치 도중 낯익은 여성을 만났다. 이제 막 20대 초입에 들어선듯한 이 여성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최 팀장과 만났다. "잘 지내냐"는 연이은 질문에 배시시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상담사들은 "결국은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생겨야 한다"며 "우리들의 관심이 작은 보탬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여가부는 이날부터 27일까지 3일 동안 전국 90개 청소년쉼터 위기청소년 상담사,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 활동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등과 합동으로 거리 상담소 운영과 아웃리치를 병행했다.

지난해만해도 2차례에 걸쳐 전국적으로 200 명 이상의 가출청소년을 구호하고 거리배회 청소년 1만여 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손애리 여가부 청소년가족정책실장은 "가출청소년 보호·지원시설인 청소년쉼터의 거리상담 지원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가출 등 위기상황에 노출된 청소년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라며 "이와 별개로 경찰, 지자체,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 등과 함께 청소년 유해환경에 대한 점검을 지속적으로 병행해 건전한 성장환경 조성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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