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운(1917∼2005)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온 이름이 있다. 차마 소리 내 부르면, 눈물은 토란잎에 물방울 구르듯 내 볼을 타고 흐른다. 봄날 처마 밑 목구멍이 빨간 제비새끼들, 하루 종일 먹이를 받아먹는다. 지어미의 고단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로서로 배고프다 짹짹거리며 받아먹는다. 잠이 든다. 그때서야 해진 날개를 접고 찬물에 밥 한술 뜨는 모성의 눈물이여! 오늘도 어린새끼들의 온기를 다독이며 눅눅한 삭신을 헌신처럼 뉜다. 어제 호미 날에 찍힌 왼손을 오른손이 가만히 감싼다. 아기 무덤처럼 부풀어 오른 손등을 영창으로 흐르는 별들이 어서 자라고 조곤조곤 어루만진다. 그때서야 별들이 잠드는 밤, 청상은 너무 일찍 왔다. 동짓달 초이레 눈이 푹푹 쌓이던 밤 아버지는 영산강 건넛마을에서 술을 잡숫고 쪽배를 타고 돌아오시다 그만, 어린 7남매를 두고 별이 되셨다.

7남매 중 내가 여섯 살 때 일이었다. 그날부터 고만고만한 어린 것들은, 늘 배가 고파서 울었다. 토방에 걸터앉아 울었다. 제비새끼들 보다 먼저 울었다. 고아원 아이들처럼 줄지어 울었다. 울다 지치면 쉬었다 또 울었다. 울고 싶지 않아도 배가 고파서 저절로 울음이 나왔다. 뱃속은 말라가는 개울처럼 쪼르륵쪼르륵 소리가 났다. 누가 주고 갔을까. 딱딱한 쑥떡 하나, 나이 순서대로 한입씩 베어 문다. 눈을 질끈 감으며 문다.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인정사정없이 문다. 이빨이 으스러지도록 문다. 이빨 자국이 선명해질수록 작아지는 쑥떡, 서열에 밀린 네 살 배기 막둥이는 초승달 보다 더 작게 남은 쑥떡을 들고 운다. 운다고 보름달처럼 커지지 않는 쑥떡은 눈물로 피어나는 달맞이꽃이 되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울음이 밥이었다. 두레밥상에 우글우글 모여 앉아 보리밥을 씹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 쌀밥을 구경할 뿐, 보리피리 삘릴리 어린 시골은 8할은 보리밥이 키웠다. 수제비가 키웠다. 새카만 보리밥 멀건 수제비, 방법이 없었다. 일찍 별이 되신 아버지는 밤하늘에 반짝일 뿐, 더는 송아지를 키우지 못하셨다. 소들은 음매 음매 아버지를 찾았다. 남의 송아지를 묵갈림으로 키워주고 그 대가로 받은 소가 가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읍내에서 십리나 떨어진 산비탈 너머너머 호롱불 같은 마을, 뒤는 가야산이 구름 위로 흐르고 앞은 목포 쪽으로 머리 두른 영산강이 철길 따라 흐르는 마을, 여름에 홍수가 나면 벼는 모두 허리가 꺾여 여지없이 흉년은 밤손님처럼 찾아오는 마을, 그 마을에서 어린 새끼들을 앞에 두고 홀로 되신 어머니는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날품을 팔아 팔아 자식들 배 곯리지 않으려 남보다 한발 앞서 밭을 매셨다. “내 새끼들 어쩌라고! 내 새끼들 어쩌라고..!” 그날 밤은 왜 또 그렇게 우셨을까. 고물고물 잠든 병아리 같은 새끼들, 어머니의 눈물은 밤새 보리피리가 되었다. 눈물 젖은 옷고름은 등잔불이 되었다.

어머니가 떠나신지 올해 20년, 모진세상 자식들 앞길 가지런히 챙겨 주시고 떠나셨다. 옹이진 손마디 가슴에 고이 안고 떠나셨다. 유언으로 남겨주신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어야” 하신 그 말씀, 내 손에 등잔불로 쥐어 주고 떠나셨다. 내가 자식을 낳고 장가를 보내고 손주를 보고나서야 별이 보이고 보리피리 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등잔불이 전깃불 보다 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재남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