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남, 이병관, 오지환(왼쪽부터).■ 자랑합니다 - 막걸리에 길을 묻는 55년 잠원동 양띠들

어느 철학자는 ‘참다운 친구는 금은보화보다 더 낫다’고 했다. 세상을 살아가며 가볍게 스치는 친구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다. 그러나 속내 털어놓고 밤새 술잔 비우는 친구는 새벽하늘 별 보기만큼 힘들다. 젊음은 그 자체가 친구였으나 석양 뒤뜰로 고개 돌리는 노스탤지어가 되고 보니 좋은 친구가 없는 삶은 쓸쓸한 오솔길이요. 등 시린 찬바람에 떠도는 낙엽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참다운 친구를 만난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요. 따뜻한 아랫목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멋있는 꽃도 향기가 없으면 벌 나비는 오지 않는다. 참다운 친구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향기로운 친구가 되자.

나는 잠원동에 40여 년을 살았다. 본디 까칠하고 호불호가 강한 성격 탓에 사람 사귐을 썩 좋아하지 않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동네 헬스클럽에서도 식당에서도 누구와 눈 마주침 없이 무소뿔처럼 혼자 다니는 독특한 스타일이다. 행여 누구와 첫인사를 나누면 눈치껏 인상을 훑고 재빠르게 외모를 스캔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며 인연의 길이를 가늠한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좋은 성격은 아니다.

이런 까다로운 내가 우연히 잠원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합창단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아는 음악이라곤 뽕짝이라는 대중가요가 전부인 밑천을 들고 무슨 배짱으로 난해한 음표 앞에서 서툰 입을 벌리게 되었는지 억지로 끌고 간 친구가 야속했다. 몇 달을 배웠을까. 동료들과 제법 친해지고 저녁 술 몇 잔에 마음이 조금씩 열렸다. 그중 띠동갑인 양띠 셋이 유독 가까웠다.

급기야 우리는 이양, 오양, 김양, 이라는 장난끼 어린 애칭을 부르며 합창 모임이 없는 날에도 막걸리 병은 탁자위에 송이송이 쌓이고 그때마다 치열이 고르지 못한 이빨들은 제멋대로 출렁거렸다. “이제 곧 70이여! 인생 뭐 있어! 빨리 마셔어...!” 삼경이 살얼음처럼 죄송하게 찾아오는 시간, 술 깨면 기억 못할 등 굽은 히브리어들이 수은등에 흩날리는 빗방울처럼 이어졌다. 늦게 배운 도둑 밤새는 줄 모른다 했던가. 자식농사 다 지어 놓고 손주들 꽃재롱이 마냥 즐거운 나이에 만난 초로의 양띠들, 뭣이 그리 즐겁고 신이 나는 것일까. 비우는 술잔마다 바람난 여인네 속치마 깔깔거리듯 버선발에 내 걸린 둥근 달이 좋았다. 막걸리가 좋았다.

빈집엔 잡풀이 주인 행세를 한다. 제아무리 멋있는 집도 관리를 안 하면 추해진다. 닦고 다듬고 그리고 따뜻한 손길이 닿아야 집도 생기가 돈다. 사람도 마찮가지다. 나이 들었다고 나태한 삶을 살면 안 된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다. 한번 나태해지면 끝없이 나태해진다. 그 나태는 생을 좀먹는 잡풀이다. 나태한 사람은 얼굴만 봐도 안다. 헛된 시간 보다, 값진 시간을 보낸 사람은 고매한 품격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 공자는 15세에 학문에 정진하고, 30에 인생을 바르게 세우고, 40에 세상사 미혹됨이 없고, 50에 하늘의 뜻을 알고, 60에 귀가 순해져 남의 말을 부드럽게 듣고, 70이 되어서는 모든 행동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자 우리 세 양띠도 이제 70이 눈앞이다. 어울려 막걸리잔 비울 날도 그리 오래잖다. 이쯤에서 우리는 생의 소중한 걸작품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품위 있는 걸작을 남길 것인가. 나태한 졸작을 남길 것인가. 신이 인간을 부러워하는 단 하나는 죽는다는 것이다. 죽지 않는 영원불멸은 권태요. 소중함을 망각하게 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잠시 접어 두고 그 소중함이 무엇인지 그 소중함은 과연 70이 가까운 늙고 철없는 세 양이 찾을 수 있을지.... 마침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오양이 신사동에 ‘신사 돌판 오리구이집’을 오늘 개업했으니, 가자! 가서 기우는 막걸리 잔에 한 번 더 길을 묻자.

시인 김재남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