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 기름유출 100일, 태안은 지금 | news | 2008-03-13 |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로 충남 태안의 청정해역이 검은 재앙에 휩싸인 지 15일로 100일째를 맞게 된다. 10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의 물결과 주민들의 헌신적인 방제작업으로 오염된 해안은 대부분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봉사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운 섬 지역을 중심으로 여전히 기름과의 사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피해주민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불안한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사고 100일이 지난 태안의 현재 모습과 기나긴 수렁과 같은 주민들의 100일간의 사투, 보상절차와 법정공방 진행상황을 소개한다.
외관상 옛모습 회복중이나 곳곳에 사고 흔적
일부 어민 조업재개 '희망의 빛'
"머리가 갑자기 텅 비어버린 것 같고, 마치 혈육중에 누가 갑자기 변을 당했을 때의 느낌이었죠."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원유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100일 가까운 나날이 지난 가운데 태안군 원북면에서 굴 양식장을 운영하던 백영곤(62)씨는 13일 사고 당시의 첫 느낌을 이렇게 술회했다.
기름띠가 검은 파도의 모습으로 국내 유일의 해안국립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태안 앞바다를 덮쳐온 사고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8일 새벽 집 주변 황촌리 모재포 바닷가에 나가 봤다는 백씨는 "해안가 자갈밭이 기름으로 뒤덮여 마치 아스콘으로 뒤범벅돼 있는 것 같았고, 주민들이 허겁지겁 삽으로 양동이에 기름덩어리들을 담아 날랐다"며 당시의 아찔한 상황을 떠올렸다.
사고 직후 태안군은 소원면 모항항에서 원북면 가로림만 입구까지의 해안선 40㎞에 폭 10~30ｍ의 기름띠가 엉겨붙으며 수려했던 바닷가가 순식간에 '기름밭'으로 변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10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과 생업을 제쳐놓고 기름제거 작업에 매달려 온 주민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100일 가까운 시간이 흐른 현재 태안 앞바다는 외견상 청정해역의 옛 모습을 거의 되찾아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만대에서 파도리에 이르는 해안선 자갈밭과 갯바위, 방파제 등에는 여전히 기름찌꺼기가 남아 사고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사고 발생 98일째인 이날 멀리서 바라다 본 소원면 만리포해수욕장에는 언제 그런 무서운 사고가 있었냐는 듯 연한 푸른 빛의 파도가 평화롭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래밭에 스며든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동원된 굴착기 2대와 작업 인부 4명이 백사장 곳곳을 갈아엎어 쌓아 올린 모래더미들은 여느 해수욕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선 모습이었고, 갈아 놓은 백사장 곳곳에 생긴 작은 웅덩이에는 둥둥 떠다니는 엷은 기름막이 선명했다.
사고후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고 횟집들이 대부분 문을 닫은 데다 '인간띠'를 이루며 백사장을 가득 메웠던 자원봉사자들마저 떠난 해수욕장의 풍경은 관광지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적막하기만 했다.
인근 모항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파제 안팎의 바다에는 예전과 같이 푸른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지만 항구에는 빈 어선 50여척이 언제 재개될 지 모르는 고기잡이를 기다리며 마냥 정박해 있었다.
서해안의 싱싱한 회를 맛보려는 미식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항구의 횟집들 역시 모두 철시한 가운데 손님들로 북적거렸던 횟집앞 간이테이블은 녹슨 의자에 먼지만 뒤덮여 있었다.
만리포에서 10여㎞ 떨어진 구름포해수욕장에는 방제작업을 위해 갈아 놓은 백사장 풍경이 마치 금방 갈아놓은 밭이랑을 떠올리게 했고, 멀리 보이는 절벽의 바위들은 여전히 검은 빛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방제작업을 위해 깎아지른 절벽 사이 소나무숲을 베어내 임시로 낸 비포장도로를 지나 도달한 '태배' 해안가에는 아직도 코를 찌르는 역한 기름냄새가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기름찌꺼기가 검게 달라붙은 바위가 곳곳에 널려 있고 자갈밭에는 기름을 흡수하기 위해 부직포를 길게 깔아놓은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해경 방제대책본부는 전날까지 수거된 원유는 4천175㎘, 흡착폐기물이 3만303t으로 유출된 원유량 1만2천547㎘중 상당량이 처리된 것으로 추산했다.
태안해경 김운태 해양오염관리과장은 "해상과 해안의 응급방제를 위한 1단계 방제작업은 1월초에 마쳤고, 현재는 해안과 도서지역 부착유 및 자갈 모래에 침투된 유출유를 제거하는 2단계 작업을 진행중"이라며 "내달부터는 해수욕장의 정상개장을 목표로 해수욕장의 기름성분을 완전히 제거하고 주변환경을 정화하는 3단계 작업을 6월말까지 실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복구정도는 해경의 발표와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다.
태배 해안가에서 방제작업을 벌이던 한 어민은 "겉보기에는 바닷가가 아주 깨끗해졌다"면서도 "백사장의 바위를 걷어내면 그 밑에 밤알만한 크기의 기름 묻은 자갈들이 즐비하다"면서 "양수기로 바닷물을 끌어와 자갈을 씻어내고 이 물로 생긴 웅덩이에 떠 있는 기름을 부직포로 빨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바닷가에서 굴딱지와 고동, 홍합 등을 따다 날로 먹어보면 냄새가 안 나는 것도 있지만 삶아놓고 보니 기름냄새 때문에 국물을 먹을 수가 없는 형편"이라며 "날이 따뜻해지면서 걸레로 닦을 수도 없는 돌 틈새에서 기름이 녹아 흘러나오기도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해안지역보다 사태가 심각한 곳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부족한 일손에 초기 방제에 실패한 섬 지역들.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와 보령시 원산도, 삽시도, 고대도, 장고도 등 기름이 엉겨붙은 섬지역에서는 주민과 자원봉사자들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기름과의 사투를 계속하고 있다.
외관상 예전의 모습을 회복한 해안지역 역시 사고로 황폐화된 생태계를 복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과 노력이 필요할 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태다.
'푸른태안 21' 임효상 운영위원장(60)은 "요즘 들어 해안가에 갈매기가 다시 몇마리씩 날아 들고 신두리 해안가에는 왜가리와 백로도 보이지만 사고 이후 바닷가에서는 고동 등 바위에 붙어사는 고착동물을 찾아보기가 거의 어렵다"면서 "생태복원은 결국 자연의 치유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겠지만 방제작업 종료 시점에 맞춰 중.장기적 환경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지역 어민들이 조업을 재개하고 나선 것은 사고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이자 '희망의 빛'으로 여겨진다.
사고후 3개월만인 지난 6일부터 어선 80여척이 주꾸미잡이를 재개한 남면 몽산포 어촌계장 문승국(44)씨는 "피해보상이 1~2년내에 끝날 것 같지도 않은 가운데 날씨도 풀리자 주민들이 조업을 다시 시작했다"면서 "서해 수산물이라고 기피하는 분위기나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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